대종회발전사

우리 순흥안문의 오랜 숙원이며 과제였던 대종회 재건은 1997년 12월 22일 총회를 거쳐 조직이 정해지고 종회의 면모가 일신되어 활발한 운영의 토대가 만들어 진 것은 응모(應模) 전회장과 현 천학(千學) 회장의 탁월한 주도력과 숭조목족의 일념 아래 각 종파와 지역의 종회 임원의 신적인 노력 그리고 전국 종친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이다.

 

사실 우리 선조님은 단합된 애족지의(愛族之誼)와 위선향념(爲先向念)이 투철하여 타성에 뒤지지 않는 선구적인 유업으로 아주 일찍 족보를 편찬하였고 1918년에는 망국의 한을 달래며 1,2,3파 전 종친이 참여하여 거족적인 무오대동보(戊午大同譜)를 위시하여 여러 숭조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한민족 말살정책으로 탄압이 거듭함에 종친의 회동이 어려워지고 이로 인하여 종친의 돈의(敦誼)와 위선향념(爲先向念)이 흐리게 되었다.

 

다행히 광복의 환희는 혼란과 사회의 무질서로 대종회의 조직은 더욱 힘들었다.

 

 1) 전국 화수회(花樹會)의 태동(胎動)

 

광복이 되고 정부수립으로 인한 어수선한 정국이 안정되면서 여러 종원들이 전국적인 순흥안씨 조직을 결성해야한다는 열망의 소리가 높아지자 1948년경 지금의 창경궁에서 성대한 창립총회가 열려 항일독립투사이고 조선일보와 한성일보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민족지도자인 군정장관(軍政長官)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1891~1965) 선생이 초대회장으로 선출되고, 장서각 앞 계단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화수회 활동은 중단되었고 서울수복 후 또 다시 화수회가 결성되어 안재홍 선생댁에 간판은 걸었지만, 혼란한 사회분위기로 활동은 부진한 가운데 회장으로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安浩相) 박사가 회장을 맡아 10여 년간 명맥만 이어왔다.

 

 

 2) 삼안친목회(三安親睦會)의 발족

 

6.25전쟁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순흥안씨 여러 종친들이 다시 친목을 도모하자는 결의가 열화와 같이 일어나 1956년경 화수회를 대신하는 삼안친목회(三安親睦會)가 발족되어 이 조직이 전국적인 화수회 조직으로 발전하는 1983년 전까지 20여 년 운영되었다. 한편 1956년 12월 5일 순흥안씨 학생돈목회가 창립되었다.

 

삼안(三安)이란 순흥안씨의 1파, 2파, 3파를 총칭한 뜻도 되고, 확대 해석하면 순흥과 탐진(耽津)과 신죽산(新竹山)을 총칭한 뜻으로도 되며, 좀 더 넓게는 광주(廣州), 구죽산(舊竹山)까지도 삼안에 포함시켜 받아들이자는 회원들의 뜻이 담겼다고도 할 수 있다.

 

주로 활동한 분은 2대 의원을 지내신 상한(相漢)씨(1파)와 당시에 3대 국회에 진출했던 동준(東濬)씨(3파)가 주로 재경인사들을 역방(歷訪)하거나, 축하차 내방하던 분들이었는데, 돈암동에 살던 정순(鼎淳)씨(1파)가 열심히 하셨고, 왜정 때부터 낙원여관을 크게 경영하던 대선(大善)씨(1파)와 마포에서 큰 제과점을 경영하던 용모(龍模)씨(1파)와 청량리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며 유학자인 미산 인식(寅植) 교수(1파), 그리고 교통부장관 경모(京模)씨(1파)와 문교부장관을 지낸 호상(浩相)씨(탐진), 제헌의원 준상(駿相), 2대 의원 만복(萬福), 충남 논산 출신의 세환(世煥)씨(1파), 그리고 총무를 맡아 심부름을 열심히 한 경준(庚濬)씨(3파)와 광심의 상진(商辰)씨(3파), 상이(商履)씨(3파), 학준(學濬)씨(3파), 이준(二濬) 박사(3파), 노량진의 치상(致商)씨(3파), 1파 종손 재찬(在燦)씨, 안중근의사의 질녀 맥결(麥結)씨(1파), 전 민정장관 재홍 선생의 자제인 정용(政鏞)씨(1파) 외에 商天, 商禹, 商瑄, 商悳, 亨濬, 秉洙, 商大, 春澤, 遠濬, 商萬, 商範 제씨 등 3파 출신이 많았고, 서울에 자주 상경하던 예천의 윤(鈗)씨(2파)도 많은 참여를 하였다.

 

회장으로는 안호상 박사에 이어 안인식 교수가 맡았고 이어 안상한 의원 다음 안동준 의원, 안경모 장관, 안균섭(安均燮) 의원, 안덕희(安德熙) 경일한의원장, 안중근의사의 족질 안춘생(安椿生) 독립기념관장으로 이어졌다.

 

행사로는 임원들이 수시로 낙원동 대현씨 여관과 서울역전에 있던 교통부장관 관저 등에서 모였으며 연차 총회는 경모 교통부장관의 주장으로 비원 또는 종묘 등에서 열었다. 특히 도산(島山)선생의 미망인과 그 둘째 자제를 왕십리 광심빌딩에서 뜻 깊은 귀국환영회를 개최한 일도 있다.

 

발족 이후 십여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고인이 되신 분도 있고, 신입회원도 늘어 갔으나, 연차총회(年次總會)가 주된 활동이었다. 족보(族譜)는 종래대로 파별로 추진하는 것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또한 마포 와우산(홍익대학 뒷산) 재찬(在燦)종손 댁에 소묘(小廟)를 짓고, 모셨던 문성공(文成公) 선조님의 사당(祠堂) 중창(重創)사업을 숙원으로 하여 설왕설래 했지만, 삼안친목회의 사업으로 결의 채택하기에는 힘에 겨운 일이었다.

 

한편 문성공의 24대 종손 안재찬(1922년생, 차종손 규태(圭台) 손자 정현(鼎鉉))씨는 문성공 묘소가 있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에서 가까운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에서 살다 1947년 회헌 문성공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단신으로 월남하여 안자묘(安子廟)를 이곳에 모실 수 있게 되었으며 초기에는 마포 와우산 부근에 있다가 1976년 3월 종친회의 결의로 사우(祠宇)를 이전키로 하고 이듬해 1977년 9월 24일 현재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 425번지에 안자묘를 낙성하여 모시게 되었다.

 

 

 3) 순흥안씨화수회(順興安氏花樹會) 중앙회 발족

 

삼안친목회 이후 27년의 성상이 지난 뒤에 관계(官界)나 실업계(實業界) 등에서 활약하던 후진들이 성장하고 성공함에 따라 종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서 누구의 권유나 목적사업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몇 사람의 독지가들의 노력에 의해 모임이 조직된 것이 전국적인 순흥안씨화수회(順興安氏花樹會)이다.

 

회장에는 과거 삼안친목회의 주동멤버의 한 분이셨던 경모(京模)씨이고, 조직을 위하여 동분서주 노력한 분은 응모(應模)씨와 천학(千學)씨(1파) 갑준(甲濬)씨(3파) 등이다. 이분들이 합심하여 1983년 10월 16일 서교호텔에서 창립총회를 통해 전국적인 화수회가 조직되고 본격적인 숭조사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창립총회에서 회장에 경모씨 부회장에 당시 치안총감으로 치안본부장(경찰청장)응모(1파), 원옥(洹玉, 박영사 사장 2파), 갑준 국회의원(3파)이 선출되었으며, 시조사단 이전중건사업추진위원장에 천학 한국중공업사장이 추대되어 본격적으로 시조사단 이전중건사업을 거족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순흥안씨화수회 중앙회 초대임원 명단]

직   위

성   명

명예회장

在燦

고      문

元宗 東濬 春生 在祜 浩相 熹慶 光鎬 八龍 永鎬 致德 德熙

     장

京模

부  회 장

甲濬(常任) 應模 洹玉 章鎬 世永 行淳 基淳

     사

二濬 景相 正模

상임이사

京模 甲濬 應模 千學 章鎬 世永 行淳 基淳 大贊 澈奐 永模 恭爀 秉鈞 영화 大崙 秉柱 秉權 承甲

사무국장

秉翊

 

화수회는 제1차 사업은 시조사단 이단성역화사업(始祖祀壇 移壇聖域化事業)이었다. 처음에는 1파 종회와 오해와 갈등도 없지 않았지만 신설된 비봉산(飛鳳山)의 자리가 천하명당인지라 그 후 모든 갈등이 말끔히 씻어졌다.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갑준 부회장이 상임부회장으로서 국회의원회관을 활용 이전중건사업을 적극 추진하였고, 천학 추진위원장이 성금모금에 앞장서 거금을 헌성하였으며, 원종(元宗) 고문께서는 을지로 5가에 있는 계산빌딩에 중앙회 사무실과 사무용품을 희사해 주었다.

 

또한, 사업부지 매입을 위하여 경모 회장, 춘생(椿生) 1파 회장, 영호(永鎬) 2파 회장, 동준 3파 회장, 천학 추진위원장, 원종 고문, 인호(寅鎬) 추원단장, 진락(鎭洛) 대구화수회장, 규찬(圭燦) 경북도회장 등 9인위원회를 구성하여 순흥의 진산(鎭山)인 비봉산 43,000여 평을 매입하고, 이전중건취지문을 전국에 75,000여 통을 발송함으로써 성금 모금운동이 활발하게 확산되었다. 또한, 매년 화수회보 및 정기총회를 통하여 사업추진 및 모금 현황을 상세하게 전국 종원에게 보고함으로써 입금 및 지출 사항을 투명하게 운영해 왔다.

 

특히 내무부장관으로 있던 응모 회장이 추원단 앞 곡선도로를 직선화하는 데 3억 원, 소수서원 및 충효교육관 및 사료전시관 건립에 15억 원의 정부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금액으로는 매우 큰 돈이었다.

 

그리하여 1983년 전국화수회 조직으로 부터 12년만인 1995년도에 시조사단 이전중건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짓고, 경모 회장의 뒤를 이어 응모 부회장이 회장으로 천학 사장이 상임부회장으로 취임하여 제2단계 사업인 추원재 (追遠齋) 중건사업에 착수하였고 1997년도에 준공하였다.

 

그러나 부동산 실명화정책으로 실제 부동산소유자만이 소유권행사를 할 수 있고, 특히 화수회는 임의단체로서 재산을 취득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총괄하는 종회조직이 절실하게 요청되었고 화수회로서는 향후 숭조목족사업을 계속하는 데 한계가 있으며 급변하는 시대조류에 부응할 수 없기 때문에 경쟁력을 갖추고 순흥안씨제 종파는 물론 전국 지방까지 전 종원이 일치단결할 수 있는 조직체를 결성하자는 종원들의 열화 같은 여망을 받들어 대종회재건결의안이 1994년도 11월에 정기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의되었다.

 

이 결의안 실천을 위해 먼저 각파 회장을 비롯한 대표들이 모여 먼저 대종회 재건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추원단의 모든 재산을 대종회로 이전할 것을 결의하고, 각파 대표 15명과 화수회 대표 3명으로 대종회발기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중 9명으로 ‘9인준비위’를 구성하며 정관초안 작성 등 모든 준비절차를 위임하였다.

 

 

 4) 순흥안씨대종회(順興安氏大宗會) 출범

 

‘9인준비위원회’는 3년여 동안 10여 차례 회의를 갖고 1, 2, 3파 정관과 전주이씨, 양성이씨, 광주이씨, 대구화수회 등에서 보내온 정관 등을 참고하여 정관 안을 작성하였고, 또한 총회개최에 따른 계획안을 각파회장과 발기위원합동회의에서 심의 확정하고 재건총회 대의원으로는 1,2,3파에서 5:2:3의 비율로 100명을 추천받고 고문 2명, 도감(都監)3명, 관향지 회장1명, 준비위원 9명, 전국원로종친 23명 등 138명으로 구성하여 1997년 12월 22일 재건총회를 개최하였다.

 

순흥안씨대종회 준비위원회위원장이 그간 준비경과를 보고하고, 준비위에서 기초한 정관 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였으며 임시의장으로 우리 안문의 원로이시고 안문발전에 크게 기여한 동준 3파회장이 추천되어 의결된 정관의 규정에 의거 임원선임의안을 상정한 바 임원선출 방식으로 전형위원제로 하기로 하여 경모, 동준, 응모, 갑준, 춘모, 유호, 승하, 석준, 종국씨 등 9인 전형위원회에서 대종회장에 응모(應模) 화수회장, 감사에 각파 사무국장을, 여타임원은 추후 회장단에서 위임하기로 함으로서 역사적인 대종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어서 화수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결산안을 승인하고 대종회 출범으로 인하여 화수회의 모든 재산은 대종회로 이전할 것과 대종회 출범과 동시에 화수회는 해산(解散)할 것을 결의함으로서 화수회(花樹會)는 15년간 많은 업적을 남기고 막을 내렸다.

 

곧이어 대종회는 임원구성을 완료하고, 대종회의 정상적인 운영을 도모하기 위하여 운영위원을 위촉하여 운영기금을 마련하고 있으며, 또한 1파 종친회관(서울시중구 필동 1가 23-16)을 임차하여 사무실을 개소하고, 1998년 6월 8일 동준회장께서 써주신 대종회 현판식을 가짐으로서 본격적인 업무를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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