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와 신사무옥

 1) 안당의 피화와 안문의 낙향

 

기묘사화는 1519년인 중종(中宗)14년 기묘년 11월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등의 훈구재상(勳舊宰相)들이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의 젊은 선비들을 몰아내고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이다.

 

연산군 때의 무오(戊午), 갑자(甲子)사화로 김종직(金宗直) 일파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대거 몰살당하여 유학(儒學)이 쇠퇴해지고 기강도 문란해짐에 따라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중종(中宗)은 연산군 때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많이 등용했고 이때 많은 활약을 한 사람들이 조광조 등 젊은 선비들이었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제자 중에서 성리학(性理學)에 가장 조예가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서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분이었다. 1515년(중종10년)에는 성균관생(成均館生) 200여 명이 연명으로 그를 천거하였다. 당시 이조판서였던 시조공[子美]의 13세 정민공(貞愍公) 안당(安瑭 선조도 그를 추천하였다. 그 뒤 조광조는 왕의 두터운 신임(信任)을 얻어 전후 5년에 걸쳐 유교를 정치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려고 크게 노력하였다. 1518년에는 그의 건의로 현량과(賢良科)가 신설되고 난 후 과거를 통하여 조광조 일파의 신진 선비들이 대거 요직에 등용되었다. 이들 중에는 정민공[安瑭의 아들인 안처겸(安處謙)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조광조는 1519년(중종14년)에 38세의 나이로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성리학을 너무 지나치게 중요시한 나머지 남곤(南袞) 정광필(鄭光弼) 등 당시 보수훈구(保守勳舊) 세력과 크게 대립하게 되었다. 훈구파의 심정(沈貞), 남곤 등은 조광조를 제거하기로 모의하고 모략하여, 조광조가 공신들을 제거한 후 스스로 임금이 될 꿈을 꾸고 있다고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가 뜯어먹게 한 소위 ‘주초위왕(走肖爲王)’의 잎사귀를 만들어 소문을 퍼뜨리고 나서 중종에게 밀고함으로써 조광조 일파를 모두 잡아 가두게 하였다. 이때 좌의정(左議政)이었던 정민공(貞愍公)과 영의정(領議政) 정광필(鄭光弼)은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말렸는데 이로 인하여 도리어 하옥(下獄)을 당하게 되었고, 조광조는 능주(陵州)에 유배당했다가 사약(賜藥)을 받고 죽었으며 정민공도 2년 후에 사형을 당했다.

 

기묘사화가 있은 지 2년 뒤인 1521년(중종 16년)에 소위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났다. 신사무옥은 기묘사화의 여파로서 심정, 남곤 등이 세력을 떨치던 때 정민공의 아들 처겸(處謙)은 이정숙, 권전 등과 같이 남곤 심정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 할 것을 밀의(密議)하였다. 이 때 함께 있던 송사련(宋祀連-처겸의 고종 4촌)은 그의 처남 정강(鄭鋼)과 공모하여 처겸의 모친 장사 때의 조객록(吊客錄)을 가지고 모반하는 인사들이라고 고변하였다. 이에 따라 처겸 ․ 처근(處謹) 형제 외에 권전 이충건(李忠建), 이약수 등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그리고 이에 관련되어 피해를 입은 우리 순흥 안씨를 보면 안정(安珽), 안찬(安瓚), 안경우(安景祐), 안숭복(安崇福), 안처순(安處順) 이런 선조 분들이 억울하게 당하고 말았다. 이에 우리 가문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따라서 많은 선조들이 먼 시골로 숨어살게 되는 등 낙향(落鄕)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멀리 함안으로 낙향하여 후학을 길러내고 많은 저술을 남긴 취우정 안관(聚友亭 安灌)이다.

 

또한 신사무옥이 일어난 후 시조공의 10세이신 직장공(直長公 安琇)의 세아드님도 몸을 숨기게 되었다. 교위(校尉)이시던 창공(昌恭), 감찰(監察)이시던 창경(昌慶) 그리고 창직(昌直) 삼형제가 우선 강원도 춘천 쪽으로 몸을 피하셨다.

 

가 창직(昌直) 공은 그곳에 머물고 창공(昌恭), 창렴(昌廉) 두 형제분이 역시 경남 함안(咸安)으로 낙향하셔서 포덕산(飽德山) 아래에 터를 잡으셨다. 그 후손중에서 시조공의 14세인 안민(安慜 공께서는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시고 그 자제님인 신갑(信甲) 공은 아버님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을 죽였으며, 그 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초계군수(草溪郡守)를 하시다가 정유재란 때 출전 순절 하셨으며 안희(安憙) 공께서는 임진왜란 때에 창의(倡義)하여 병사를 모아 적과 싸워 승리하는 등 나라에 충절을 다 하였고,그 후손들이 크게 출세를하고 있다.

 

그리고 1531년에는 13세 사과공 안훈(安燻)도 충청도 괴산으로 낙향을 하였다. 이와 같이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으로 우리 안문은 순흥의 금성대군사건 다음가는 큰 수난을 겪었고, 그로 인하여 고려조에서 조선조 중엽까지 전성시대를 이루던 우리 안문이 낙향 또는 은거(隱居)의 길을 밟게 되었다.  

 

 

 2) 안당(安瑭)  

 

안당은 신사생(辛巳生)이고 자(字)는 언보(彦寶)이다. 경자년에 생원이 되었고, 신축년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기묘년에 파직되어 집에 있었다. 얼마 안 되어서,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임금 곁에 있는 소인들을 숙청하려고 난을 꾸미다가 일이 발각되어 대역(大逆)으로 논죄되었는데, 연좌(緣坐)되어서 죄를 입었다.

 

기묘년 가을에 대사간 이성동(李成童) 등이 3공을 논란한 소장에, “안모는 마음가짐이 진중(珍重)하고 일 처리하는 데에 밝으나, 스승이나 벗에게 깨우쳐 얻은 것이 조금도 없었으므로 능히 허심으로 국론을 받아들이지 못 하였다. 정부(政府)에 들어온 뒤에는 이조에 있을 때보다 명망이 줄었다.” 하였다.

 

보유: 폐주(廢主)가 정사를 어지럽히면서 간원(諫院)을 오랫동안 혁파하였다.

 

반정(反正)하던 날, 특히 공에게 대사간을 시킨 것은 그가 강직하므로 황폐한 정사를 능히 구제하리라는 것이었다. 굽은 것을 탄핵하여 바른 데로 돌려서 묵은 폐단이 말끔히 가셨다. 네 번이나 대사헌을 맡아서 무너진 기강을 떨쳐 일으키고, 원통하게 막힌 것을 파헤치고 씻었다.

 

이조(吏曹)를 맡아서는 분경(奔競)하는 버릇을 통렬하게 개혁하였다. 재상들이 편지로 요청하는 따위를 일체 따르지 아니하고, 재능을 요량(料量)하여 관직을 주면서 품자(品資)에 얽매이지 않았다. 무릇 효행으로 공천된 사람은 행실을 표제(標題)하여서 주의(注擬)하였다. 또 건의하기를, “경술(經術)에 밝고 의를 행하는 선비를 만약 자급(資級)에 따라 으레 일명(一命)으로 조용(調用)한다면 선비를 장려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당시에 명망 있는 선비로 조정암(趙靜庵) 같은 여러 분을 특히 6품직에 제수하고, 또 김모재(金慕齋)․김충암(金冲庵), 참판 송흠(宋欽), 판서 반석평(潘碩枰)도 차례를 밟지 않고 뽑아 쓰기를 청하였는데, 이분들은 후일에 모두 이름난 재상이었다.

 

또, 구언(求言)하면서 국사(國事)에 대해 말한 사람을 죄주어서 언로(言路)를 막는 것은 불가하다고 힘껏 아뢰었다. 임금은 법 밖의 것을 건의한다는 것으로써 꾸짖고, 대간(臺諫)은 국사를 그르쳤다는 것으로 탄핵하고, 재상들은 자기들의 청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으로 꺼렸으나, 공은 안연히 동요되지 아니하여서 유속(流俗)을 격동해 밝히고 사기(士氣)를 떨쳐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하였다. 을해년 이후에 이상(二相) 이장곤(李長坤)과 문절공(文節公) 신상(申鏛이 잇달아 이조를 맡아서 기묘년의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이때에 명현들이 임금의 총애를 입고 문치(文治)를 협찬하고 예법을 밝혀서 거의 성대한 대도(大道)를 이룰 뻔하였으나, 새로 등용된 여러 현신이 과감히 행하는 데에 용감하여서 과격하고 조속히 이루려는 병통이 없지 않았다.

 

공이 태부(台府 의정부)에 오른 뒤에 문익공과 함께 대체(大體)를 지켜서 과격한 언론을 억제하고 인심을 진정하며, 조금이라도 조화시켜서 영구하기를 도모하였다. 대간이 3공의 성품과 행실을 두루 들면서 우물쭈물 그저 세속을 따른다고 기롱하므로, 공이 사직을 간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또 그 아들 3형제가 천과(薦科)에 합격하여서 모두 청현(淸顯)한 벼슬을 하게 되자, 복이 너무 성함을 경계하고 당시의 정세를 살펴서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부인이 갑자기 죽은 뒤에도 공은 억지로 벼슬에 나갈 뿐이었다. 11월 15일 밤 5경에 의정부 서리(胥吏)가 와서, “3경에 영의정이 소명(召命)을 받들고 예궐(詣闕)하였고 지금 소명이 있습니다.” 하자, 공이 놀라서 달려갔는데, 밤이 아직 깊지 않았다. 영의정 문익공이 빈청(賓廳)에 홀로 앉았으므로 그까닭을 물으니, 문익공이 눈물을 뿌리고 고개를 저으면서 차마 말을 못하는데, 좌우에서 병기(兵器)를 전(殿) 뜨락에 벌여 놓았음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이어 문익공과 함께 조정 백관을 모아서 죄를 논의하기를 힘껏 청하고 반복해서 논계하였다. 이에 임금이 참의(參議) 이상이 모여서 의논하도록 명하니, 드디어 많은 관원을 거느리고 함께 계(啓)해서 신구(伸救)하였다. 19일에 김전이 정승이 되었으므로 공은 예(例)에 따라 좌의정으로 승진하니, 대개 문경공(文景公) 신용개(申用漑)를 대신한 것이었다. 12월에 대간이 집정한 자와 함께 명류(名流)에게 죄를 주고자 하여 35명을 기록해 올리고 아울러 귀양보내기를 청하였는데, 공을 첫째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 사람들을 다 귀양보낼 것 같으면 인심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하고, 남곤(南袞) ․ 이유청(李惟淸)에게 3등급으로 나누어서 표를 달도록 명하였다.

 

공은 면직하는 것만으로 그쳤는데, 신사년 가을에 심정(沈貞)이 집의(執義) 윤지형(尹止衡)을 부추겨서 관직을 삭탈당하게 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당시 재상에게 저촉되었다는 말이 있으므로, 공이 놀라서 땅에 넘어지기까지 하였다. 곧 상달(上達)하고자 하다가, 말뿐이고 실상은 없는 일을 가지고 틈이 벌어져 다시 사화라도 일으킬까 두려워하였다.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시골에 돌아가서 제대로 가라앉고 탈없이 하려던 것이었는데, 친하고 믿던 자가 좌우에서 입을 놀리고, 칼을 든 자가 눈을 부릅뜨고 기다릴 줄을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공은 평소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아 녹봉 외에는 저축한 것이 없었고, 벼슬이 숭품(崇品)에 이르렀으나 청렴과 검소함이 더욱 드러났다. 부인은 장사지낼 적에도 조처할 길이 없어 남에게 빌려서 장사를 치르니,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성품이 굳세고 곧아서 오직 국사와 공도(公道)만을 생각하였으므로, 뭇 소인에게 미움을 받아 마침내 큰 화(禍)에 빠졌으니, 아 슬프다. 공이 일찍이 호서를 안찰(按察)할 때에 시를 짓기를,

 

고삐를 잡고서 징청하기를 생각하는 것, 내 어찌 감히 하랴 攬轡澄淸吾豈敢

다만 충과 의를 행할 뿐, 자신을 위한 꾀는 하지 않으리 只將忠義不謀身

하였으니, 말이 지극하다 할 수 있다.

 

정민공 안당이 죽은 뒤 46년 만인 병인년에 공의 손자 안구(安玖)가 글을 올리기를, “무릇 고변(告變)하는 사람은 중한 상을 바라는 것이므로 반드시 큰 죄를 들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송사련(宋祀連)이 고한 것은 다만 대신을 해치기 위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런즉 반역하려는 무리가 아님이 분명한데도 지나치게 중한 죄를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때 죄를 받았던 사람은 이미 중묘조(中廟朝)에 모두 수서(收敍)하심을 입었는데, 오직 신의 조부만이 신설(伸雪)함을 얻지 못함은 진실로 구천(九泉)에서도 원통함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명묘조(明廟朝)께서 특히 불쌍하게 여겨서 직첩을 돌려주었다. 금상(今上) 만력(萬曆) 을해년에 태상(太常)에서 논의하기를, “안모(安某)는 타고난 성품이 대범하고 곧으며, 일 처리 하는 것이 굳세고 과감하였다. 외모는 씩씩하였으나 내심은 온화하였다. 정의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고, 집에 거처하는 것은 검소하였다. 마음을 다하여 봉공(奉公)하였고, 어진 인재를 뽑아서 기묘년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성대한 기회를 열었고, 간사한 논의를 힘껏 배척하여 충성스럽고 착한 신하가 억울하게 무함 받은 옥사를 구하려고 하였는데, 권세를 잡고 있던 간사한 무리가 감정을 품고 옥사를 억지로 만들어, 두 아들이 함께 극형을 당하였고 자신도 면하지 못 하였다. 아, 슬프도다.” 하였다. 시법(諡法)을 상고하건대, “곧은 도로써 흔들리지 않음을 정(貞)이라 하고, 국사에서 어려운 일을 당한 것을 민(愍)이라 한다.” 하여, 정민공(貞愍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3) 안처순(安處順)  

 

안처순은 성종 24년부터 중종 29년 때의 인물이다. 자(字)는 순지(順之)이며, 호는 기재(幾齋)․사제당(思齊堂)이다. 조부는 전주부윤 지귀(知歸)이며, 부친은 성균관전적 기(璣)이고 모친은 능성현령 임옥산(林玉山)의 딸이다.1513년(중종 8)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후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18년 홍문관 박사로 있다가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서 구례현감을 청하여 고을 현감이 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에 이행과 함께 연루되었다가 겨우 화를 면하고 은퇴하였다가 성균관학관․ 경성교수를 지내고, 1533년 전적이된 뒤 양현고주부․봉상시판관에 이르렀고 43세에 병을 얻어 일생을 마쳤다.

 

『충암집(冲庵集)』에 송별시가 두 편이 있다.

 

효도로 다스리는 태평성대를 만나 孝理逢明代

경연의 시종신을 내보내게 되었네 經帷掇從臣

마음가짐이 무거운 짐을 지듯하니 立心如任重

가는 곳마다 인을 행할 수 있으리 隨處可行仁

축수잔은 환과고독(鰥寡孤獨)에게 널리 입혀지고 壽洞沾惇寡

예악의 다스림은 산골 백성에게 입혀지리 弦歌被洞民

북당에서 기뻐하며 경축하는 기운이 北堂歡慶氣

훈훈히 온 백성의 봄이 되리 薰作百家春

자네가 표연하게 떠나는 것 부러워하니 羡爾飄然去

응당 슬픔과 기쁨을 고르게 할 것이다 還應偸戚均

정위(모친)를 모시려고 전폐를 멀리하니 庭闈遙輦陛

시골에는 마음으로 친한 자가 가끔은 있으리라 鄕邑間心親

조각달은 남방에 임했고 片月臨炎徼

강 흐름은 바닷가에 닿았다 江流接海漘

하늘 남쪽에 편지마저 끊어지려니 天南書問絶

풀이 돋아나는 봄에 서로 생각하리 相憶草生春

 

정암(靜庵)도 시 두어 편을 지어서 전송하였다. 한편 공이 공사를 보던 여가에 일찍이 쌍계사(雙溪寺)에 유람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짓고 그 해 겨울 파직되었고, 곧 죽었다.

 

이끼 낀 길을 천천히 걸으니 발이 저절로 올라가게 되고 徐步苔□足自躋

산당 돌비는 옛 일을 상기할 만하다. 山堂石□事堪稽

아득히 오랜 옛적 삼한 선비가 놀았고 蒼茫千古三韓士

울퉁불퉁한 것은 지금 쓴 것과 같이 네 글자가 적혀 있다. 磅磚如今四字題

만세 문장은 일월을 부호했고 □世文章扶日月

당시 필법은 널리 전했다. 當時筆法可端倪

청학을 사랑해서 선부(신선 이 사는 골)를 찾았으나 爲憐靑鶴尋仙府

솔 향기가 소매에 가득할 뿐 길이 아득하다. 滿袖松香路欲迷

 

 

 4) 안찬(安瓚)  

 

의사 안찬은 의술에 정통하고 이학(理學)에 더욱 정(精)하니 선비들이 벗하였다. 죄에 연루되어 장배(杖配)되었는데 연서역(延曙驛)에서 죽었다.

 

기묘년 변이 일어났을 때에 찬성 이항(李沆)이 대사헌이었는데, 안찬이 당인(黨人)과 교제하였다는 이유로 잡아와서 국문하였다. 수일 동안 형장을 받은 다음 하루는 외지로 유배되었는데, 연서역에 이르러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편작(扁鵲)과 창공(倉公)이 모두 의술로 이름이 세상에 높았으나 마침내 앙화를 받았으니, 명예를 다투어서 서로 도모하는 것은 사(士)라는 무리도 그러한데 하물며 딴 기술이리오. 안찬의 죽음도 괴이하다 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

 

 

 5) 안처근(安處謹)  

 

생원 안처근은 경술생이고 자(字)는 정부(靜夫)이다. 벼슬이 홍문관 박사였는데 그의 형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좌되어 베임을 당했다. 순흥(順興)이 본관이고 의정 당(瑭의 아들이다.

 

공은 기묘년에 생원이 되었다. 천목은 단아(端雅)하고 명민(明敏)하며, 추향(趨向)하는 것이 바르고, 학행과 지조가 있다는 것이었다. 곧 홍문관 정자(正字)로 제수되었다가 박사(博士)로 승진되었다. 6월에 모친상을 당하고 복(服)을 벗고 나서, 신사년 겨울에 송사련(宋祀連)의 무함을 당해 신문을 받으면서 곤장 50여 대를 맞고 죽었는데 역시 법대로 처리되었다. 경자년에 특별히 처와 자식이 연좌된것은 용서받았다.

 

행장에는, “자질이 장일안상(莊一安詳)하며 평상시에도 태만하거나 방사(放肆)한 언동이 없었다. 벗과 사귐에는 오랠수록 더욱 공경하였다. 세상에서, ‘구슬[珠]이 셋인데 백미로 여러 형보다 낫다.’ 하였다. 정진(鄭震)이 지었다. 사위 정진(鄭震) 주부 우필성(禹弼成) 찰방, 외손 정응선(鄭膺善) ․ 정명선(鄭明善) ․ 정종선(鄭從善) ․ 우치근(禹致勤) ․ 우치검(禹致儉) ․ 우치적(禹致績)이 있다.  

 

 

 6) 안정(安珽)  

 

진사 안정은 갑인생이고 자(字)는 정연(挺然)이다. 주서(注書)로 있었는데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서 매를 맞고 귀양갔다. 순흥(順興)이 본관이고 서울에서 살았으며, 병조 좌랑 안처선(安處善)의 아들이다.

 

병자년에 진사가 되었다. 천목에는 학행과 지조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한(內翰)으로 뽑혀서 주서로 전임되었다. 사화가 일어나던 날 숙직하였는데, 밤 이경에 정원 서리(書吏)가 말하기를, “재상 두어 사람이 가만히 영추문(迎秋門)으로 숨어 들어왔고, 근정전(勤政殿)에 불빛이 있는데 군사가 에워싸고 서 있습니다.” 하였다. 숙직하던 승지 공서린(孔瑞麟)․윤자임(尹自任)․한림 이구(李構)와 함께 합문(閤門) 밖에 나아갔다. 잠깐 뒤에 내수(內豎 신순강(申順剛)이 나와서 성운(成雲)을 부르니, 성운이 칼을 차고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공이 붓을 쥐고 쫓아가니 신순강이 문지기를 시켜 잡인(雜人)을 금단하라고 하였다. 공이 성운의 띠를 거머쥐고 들어가려고 하니, 문지기가 공의 손을 쳐서 떼어 놓고 함께 붙들고 나왔다. 심정(沈貞)이 빠른 걸음으로 나와서 공의 손을 잡고, “천위(天威)가 대단하니 우선 들어가지 말게.” 하였다. 조금 후에, 성운이 나와서 소매 속에서 작은 종이 쪽지를 내어 이장곤(李長坤)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정원에서 숙직하던 네 사람은 모두 하옥되었다. 이튿날 승지 유인숙(柳仁淑) ․ 공서린 ․ 홍언필(洪彦弼)이 먼저 석방되고, 공과 수찬 심달원(沈達源)도 또한 석방되어 나왔다. 신사년에 송사련(宋祀連)이 바친 서기(書記)에 공의 이름도 있었으므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곤양(昆陽)으로 유배되었다가 무술년에 사면되었고, 을사년에 천과(薦科)를 회복하게 되어서 전한으로 제수되었다. 또 파과(罷科)된 뒤에는 양성현감(陽城縣監)으로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죽었다. 스스로 죽창(竹窓)이라 호(號)하고 거문고와 글 ․ 꽃나무로 스스로 즐기었다.

 

아들 안광국(安光國) 영(令) ․ 안서국(安瑞國) 생원, 사위 이덕보(李德輔) ․ 한효순(韓孝純), 손자 안증형(安證瑩)이 있다.  

 

 

 7) 안처겸(安處謙)  

 

진사 안처겸은 병오생이고 자(字)는 백허(伯虛)이다. 임금 곁에 있는 간인(奸人)들을 숙청하려고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서 베임을 당했다. 순흥(順興)이 본관이고 의정(議政) 안당(安瑭의 아들이다.

 

계유년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일찍이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정문충공(鄭文忠公포은)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도록 한 것과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도록 청한 것은 모두 공이 장의(掌議)로 있을 때에 건의한 것이었다. 이때 석전(釋奠)의 의물(儀物)에 옛 제도가 아닌 것이 많았다. 『예경(禮經)』에 의거하여 헌의(獻議)해서 개정(改定)했다. 그런 다음에 형갱(鉶羹 양념을 넣은 국) ․ 대갱(大羹 양념을 넣지 않은 국) ․ 양수(陽燧) ․ 명수(明水)를 각각 그 제도대로 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 제도대로 준용(遵用)한다. 천목에는 재기(才器)가 있다는 것이었다. 여러 번 주의(注擬)하였으나 조용(調用)되지 못 하였는데, 6월에 비로소 성균관에 분차(分差)되었다. 이달 그믐에 모친상을 당하고 신사년에 복을 마쳤다. 이때에 권간(權奸)의 독수(毒手)가 사림을 해침이 해마다 심각하였다.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었고 사화 사건에 생각이 미치면 말을 따라 눈물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장인의 집에 있을 때에 우연히 시산 정(詩山正) ․ 권전(權磌)과 상종하였는데, 이들도 또한 강직하고 강개한 사람이었다. 세상일을 분하게 여기면서 회포를 풀다가 저촉되는 줄도 모르고 말하는 중에 혹 ‘권간을 제거하여 사림을 위로한다’ 는 말도 있었다. 서로 함께 말하다가 드디어 한담(閑談)으로 되었다. 송사련(宋祀連) 등도 또한 서로 조언하면서 희롱하였는데, 도리어 해칠 마음을 품고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에게 아부하여 중상(重賞)을 요구할 양으로 드디어 처질(妻姪) 정위(鄭瑋)와 함께 공들의 한담을 빌려서 대신을 모해하려 한다고 고하였다. 추관(推官)이 두드려 만들어서[鍛鍊] 화를 얽었던 까닭으로 드디어 큰 죄에 빠져들었다. 그 뒤 경자년에 중묘께서 노(孥된 것은 특별히 용서하였다. 공의 장인 옥당수(玉堂守)의 집이 제생원(濟生院)에 있었는데 권전(權磌)․시산(詩山)의 집과 서로 가까웠다. 묘지(墓誌)에, “공은 호준(豪俊)하고 강직하며 의를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였다. 시사(時事)를 걱정하여 분하게 여기다가 드디어 큰 허물에 빠졌다. 대개 분하게 여기는 심정이 격동하여서 참지 못하고 바른말을 하다가 재얼(災孼)이 되어서 화를 낳게 하였으니 어찌 통탄함을 금할 수 있으랴.” 하였다. 청강 거사(淸江居士)가 지었다. 아들 안로(安璐) ․ 안표(安王票) ․ 안근(安王斤), 사위 허제(許悌), 손자 안응달(安應達) ․ 안응길(安應吉) ․ 안응초(安應初) ․ 안응덕(安應德) ․ 안응□(安應□) ․ 안응진(安應進)이 있다.  

 

 

 8) 안처함(安處諴)  

 

유학(幼學) 안처함은 무신생이고 자(字)는 윤숙(允叔)이며 수찬으로 있었다.

 

형 안처겸(安處謙)의 모의를 부친 안당(安塘)에게 알려 이로 인해 발각되어, 이 공로로 죄는 면했으나 역시 정속(定屬 적몰된 집 사람을 종으로 삼음)되었다. 순흥(順興)이 본관이고 서울에서 살았다.

 

공이 젊었을 때 여러 벗과 말하기를, “30살이 된 뒤에 감시(監試)를 보고 40살이 된 뒤에 동당(東堂 식년 과거)을 보겠으며 그 전에는 결코 과장(科場)에 가지 않겠다.” 하였다. 무인년에 공의 나이가 31이었는데 그의 부옹(父翁)이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라고 명하니, 답하기를, “군자의 한 말은 천년이 지나도 고치지 않는 것입니다. 소년 때에 벗에게 한 말이 있으니 지금은 시장(試場)에 갈 수 없습니다.”

 

하였다. 부옹도 또한 강권(强勸)할 수 없었다. 천목에는 단정 후중하고 조수(操守)와 실천에 법이 있으며, 성품이 견확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재행이 있다는 것이었다.

 

발탁되어서 홍문관 저작(著作) ․ 박사 ․ 수찬을 역임하였다. 모친상을 만나 복을 마치고 나서, 신사년에 겨울 송사련(宋祀連)에게서 형이 여러 벗과 당시 재상에게 저촉되는 말을 했다는 것을 듣고 부옹에게 고하였다. 부옹은 그 말을 소멸시켜 없애려고 가족을 거느리고 외향(外鄕)으로 돌아갔다. 송사련이 상을 바라고 무고하여 큰죄에 빠뜨렸는데, 공도 연좌되어서 청도(淸道)에 정속되었다. 임오년 가을에 천둥치는 변이 있었는데, 남곤(南袞)이 공은 부옹에게 알린 공로가 있다는 것으로써 석방하기를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편리한 대로 한가하게 22년을 살다가 죽었다.

 

행장(行狀)에는, 타고난 자질이 혼후(渾厚)하고 침잠 장중(沈潛莊重)하여 말을 빨리 하거나 장난스러운 낯빛이 없었다. 집안[環堵]이 쓸쓸하게 가난하였으나 남을 구휼하는 데에 급하였고, 응낙한 것은 신(信)을 지키고 만약 불급(不及)할 형편이면 분주하게 남에게 꾸는 수고로움도 꺼리지 않았다. 초포 노인(樵圃老人)이 초고하였다. 아들은 안구(安玖). 사위 조희맹(趙希孟), 외손 권인경(權仁經), 권의경(權義經)이 있다.  

 

 

 9) 송사련과 안당 ․ 안처겸의 통한(痛恨)  

 

1521년(중종 16년) 10월 11일 관상감 판관 송사련과 학생 정상의 무고로 안처겸 일파가 처형되는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났다. 신사무옥의 피바람을 일으킨 송사련은 본래 안당의 서매(庶妹) 감정의 아들이었다. 일찍이 사예 안돈후는 늘그막에 아내를 잃고 중금이라는 종을 시켜 자신의 시중을 들게 했는데 그 사이에 난이가 감정이다.

 

1483년 안돈후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안당, 안정, 안총 등이 중금의 손에 길러졌다. 감정은 배천의 갑사인 송자근쇠와 혼인해 1488년 송사련을 낳았다. 송자근쇠는 안돈후의 맏아들 안인의 소개로 관상감에 들어갔는데 장성한 송사련은 아버지의 뒤를 좇아 관상감에 들어간 뒤 1519년 과거에 급제해 관상감 판관이 되었다. 지리학에 능통해 관상감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안당은 자신의 서매를 송사련에게 출가시켰다. 이런 인연으로 송사련과 안당은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 무렵 기묘사화를 통해 정권을 잡은 심정과 남곤은 조광조 일파를 두둔했다는 이유로 안처겸, 문근, 유인숙 등을 파직시켰다. 그 과정에서 안처겸이 훈신들을 비방하자 동생 안처함은 송사련과 함께 그를 부친 안당이 머물던 용인의 농장으로 데려갔다. 안처겸은 또다시 장인의 집에서 이정숙과 권전 등을 만난 뒤 심정, 남곤등이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며 이 무리를 제거해야 나라가 바로 설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송사련은 맞장구를 치면서 안처겸의 말에 동조하는 척했지만, 실은 이를 기화로 오랜 신분의 덫에서 벗어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1521년(중종 16년) 10월 11일, 송사련은 조카 정상과 함께 안처겸의 어머니 상중에 작성한 ‘조객록(弔客錄)’과 장사지낼 때 일을 한 역부들의 명부를 증거물로 삼아 안당 부자와 이정숙, 권전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했다. 중종은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남곤, 지의금 심정, 승지 윤희인․조옥곤 등 훈구파 대신들을 소집해 안처겸 일파를 체포하게 했다.

 

곧 혐의자들이 속속 국문장에 끌려왔다. 그들은 역모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가혹한 고문을 견딜 수 없었다. 그 결과 안당, 안처겸, 안처근 삼부자가 처형되었고 권전은 국문 도중 장독으로 죽었다. 또 이경숙, 이충건, 이약수, 조광좌 등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송사련은 역모를 고변한 공으로 정3품 절충장군에 제수되고, 죄인들에게 몰수한 전답, 가옥, 노비 등을 하사받아 30여 년간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의 맏아들 송한필과 둘째 아들 송익필은 학문이 뛰어나 이이에게서 함께 성리학을 논할 만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기까지 했다. 훗날 송익필은 선조 때 서인의 영수 정철의 막후에서 정여립의 난을 빌미로 남인을 일망타진하는 데 앞장섰다. 그뒤 심정, 남곤의 일파가 몰락하고 사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1566년(명조 21년) 안당의 손자 안윤의 상소로 안처겸 등이 신원되고 직첩을 돌려받았다. 1575년(선조 8년)에는 안당의 증손 안노의 상소로 신사년의 옥사가 무고임이 밝혀지면서 송사련 일가가 반노(叛奴)로 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