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과 안추원과 안단비의 비극

1637년 1월 30일 오전 남색융의 차림으로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는 삼전도를 향해 걸었다. 이윽고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인조는 세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치욕적인 항복의식이었다. 홍타이지는 이어 승전을 자축하는 잔치를 벌였다. 홍타이지에게 갑옷을 선물받은 인조는 다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잔치가 파한 후에도 인조는 밭 가운데 앉아 기다려야 했다. 해질 무렵에야 도성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분부가 떨어졌다. 인조는 청군의 호위 속에 서울로 향했다. 지나는 길에서는 만 명에 가까운 포로들이 울부짖었다. “왕이시여, 왕이시여! 우리는 버리고 가십니까” 호곡하는 그들을 위로하고 인조는 창경궁으로 들어갔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고, 치욕의 날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남긴 후유증 가운데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바로 엄청난 수의 포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즉 포로문제였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게 사로잡혀 심양으로 압송된 포로의 수는 얼마나 될까? 1637년 인조의 항복으로 전란이 끝난 직후 최명길은 병자호란의 전말을 명에 알리기 위해 공문자료에 조선인 포로의 수를 50만이라고 했다.

 

일찍이 청태종은 항복을 받을 때 “포로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하는 자는 불문에 부치지만 일단 청 영토로 들어갔다가 도주하는 자는 조선이 다시 잡아 보내야 한다.”는 약조를 인조에게 요구한 바 있다. 그리고 탈출했다가 도로 잡혀 끌려간 포로들은 청군에 끌려가 앞뒤꿈치를 잘리는 고통을 겪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부모형제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천신만고 끝에 타지에서 탈출해온 포로들은 잡아 돌려보낸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이런 50여 만 명의 포로 가운데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귀향의 열망을 끝내 억누르지 못하고 늦게나마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역사적인 사료로 대표적인 경우로 현종 대에 도망쳐온 안추원(安秋元)과 숙종 대에 도망쳐 온 안단(安端)이 있다. 먼저 안추원의 행적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경기도 풍덕 부근에 살았던 안추원은 호란 발생 직전인 1636년 7월 일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했다. 하지만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는 심양으로 끌려간 뒤 한족 출신 대장장이에게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 1644년 청이 입관에 성공하자 안추원은 청조의 이주령에 따라 북경으로 흘러들어갔다. 이윽고 1662년(현종 3) 안추원은 조선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산해관을 통과하고 만주를 가로질러야 하는 대모험이었다. 하지만 그는 산해관을 통과하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다. 북경으로 송환되어 형벌을 받았던 그는 결국 2년뒤 다시 탈출을 시도하여 성공했다.

 

조선 조정은 28년 만에 탈출에 성공한 안추원을 처리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그를 고향인 풍덕으로 보냈다. 하지만 풍덕에는 이미 안추원의 혈육들이 아무도 없었다. 전쟁은 그의 가족들을 풍비박산 내었던 것이다. 조정은 청이 알까봐 우려하여 쉬쉬했다. 그에게 처음에는 잠시동안 숙식을 제공했지만 제대로 된 생계대책을 마련해주지 않았다. 혈혈단신의 처지에 생계마저 막막해진 안추원은 결국 북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두 차례나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었지만 그렇게 돌아온 고향은 그에게 또 다른 이역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책문에서 체포되었다.

 

안단의 행적 또한 처절하다. 그는 강화 천총 안몽열의 아들로 역시 병자호란 당시 포로가 되었다. 부친의 직책으로 보아 그 또한 강화도에서 붙잡혔을 개연성이 높다. 심양으로 끌려가 갑군의 종이 되었던 그는 이후 북경으로 들어가 사역되었다.

 

안단은 1674년(숙종 즉위년) 자신의 주인이 행방불명되자 조선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포로로 잡혀 끌려간 지 무려 37년만이었다. 안단은 산해관을 통과하여 봉황성을 거쳐 압록강의 중강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강을 건너게 해달라는 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의주부윤은 그를 결박하여 봉황성으로 압송했다. 마침 청 사신들이 조선으로 오고 있던 상황에서 청의 힐문을 의식한 조처였던 것 같다. 입국을 거부당하고 봉황성으로 끌려가던 안단은 “고국 땅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나를 죽을 곳으로 빠뜨린다.”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안추원과 안단의 처절한 사례는 병자호란 시기 포로 문제가 가진 다양한 측면들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안추원은 28년, 안단은 37년만에 탈출을 결행했다. 청군은 수전에 약하므로 강화도로 피난하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 두 사람의 기대는 김경징을 비롯한 강화도 방어책임자들의 직무유기 때문에 처음부터 산산이 깨졌다.

 

청으로의 권위와 정권의 정당성을 흔들었다. 더욱이 청은 도망자 송환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 인조를 하야시킬 수도 있다고 위협했거니와 인조는 그 때문에 청의 요구에 순응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오랑캐의 침략을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또 변변하게 저항하지도 못함으로써 이미 권위가 떨어져버린 그의 왕권을 더욱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병자호란 당시 수십만의 포로가 발생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청의 침략과 그들의 과도한 포로욕심 때문이었다. 특히 청군의 일원으로 조선 침략에 가담했던 몽골 출신 병사들은 포로 사냥과 겁략에 광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정한 항산이 없었던 그들이 포로사냥에 집착하게 되면서 조선의 피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포로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심이 거의 사라질 무렵 안추원과 안단 같은 사람들이 탈출해왔다. 하지만 수십년 만에 탈출한 그들은 입국하지 못하거나 다시 청으로 귀환을 시도해야만 하는 비극을 맞았다. 병자호란을 통해 수많은 안추원과 안단이 생겨났거니와 이들의 비극은 새로운 관점에서 병자호란을 다시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새삼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