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주(興州)는 유서 깊은 순흥의 옛 이름이다. 한때는 삼남 제일의 아름답고 번창했던 도시로 ‘남순북송(南順北松: 남쪽에 순홍, 북쪽에 송도)’이란 명예를 누렸던 번성했던 곳이었다. 비오는 날에도 비 안 맞고 다닐 수 있는 고래 등 같은 기와집들이 즐비했으며, 참나무 숯불에 이(쌀)밥을 해먹고 높은 문화생활을 누리며 강력한 긍지를 갖고 흥성하게 살던 곳이라 했다.
그래서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신이 알려준 명당복지(明堂福地)라 했고, 천자장태지지(天子藏胎之地)로 세인들에게 회자되었다. 순흥은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소수서원․벽화고분․사찰․성지 등 수많은 문화유산과 유적들을 보존·전승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순흥도호부의 관아는 단종복위사건 때 불탔으나 숙종9년(1683)에 복부되자 부사 심집에 의하여 다시 세워졌는데 지금의 순흥면사무소는 당시 도호부 자리이고, 옛날 것은 봉서루만 남아있다. 루에 걸린 ‘흥주도호부’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이라 전한다.
1. 삼국시대의 각축장이며 유적의 보고
이 지역은 삼국시대의 각축장이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백제문화의 접점처로서 이웃나라 문화를 폭 넓게 받아들여 특히 역사적인 유물이 많다.
삼국시대의 유적이며, 고구려 계통의 웅장한 신라고분(기미명묘․어숙묘․바느레 고분 등) 현란한 벽화․금은 세공의 부장품, 임금의 태장, 소헌왕후의 태실․사찰(․두타사․명경암․백운암․석륜사․희방사․부석사․성혈사․초암사)․순흥안씨추원단․소수서원․봉서루․향교․금성단․세연지․패도(합도․조개섬)․사현정․선비촌․소수박물관․숙수사지․배점의 정려비․금성대군 위리안치지․금성단 은행나무의 설화 등등 많은 유․불교문화 유산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통문화와 각종 문화재들로 가히 야외박물관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세인들은 이곳을 문․충․절의 고장으로 소위 ‘남순북송(南順北松)’이라 일컬어졌던 아름다운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삼남의 제일향임을 증거하고 있다.
특히 순흥은 우리나라 정통유학의 원천이요 요람이다. 순흥이 낳은 나라 도학의 비조 안향에 이어 안문개․안축․안보 등 많은 명현을 배출, 가장 먼저 유교문화의 꽃을 찬연히 피웠다.
그리고 ‘원단촌(院壇村)’이란 우리나라 성리학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던 민족교육의 산실이자 인재양성의 요람이며, 정신문화의 도장이었던 소수서원의 원(院)과 살신성인으로 충절을 지키며 대의명분에 죽고 살았던 조선선비의 기개가 담긴 만고충절의 상징 처인 성인단(成仁壇, 금성단의 단소 이름)이 있는 문충의 고장마을이라는 뜻으로 동명을 명예롭게 쓰면서 선비의 고장임을 자부하였다.
2. 주자학의 발상지(發祥地)요 요람이며 선비의 고장
우리나라의 주자학 발상지요 요람인 소수서원과 절의의 충절로 얽힌 금성단은 순흥의 얼과 정신이 깃든 문과 충․절의 고장으로 문사지향이요, 또 충절지향으로써 순흥을 대표하는 상징적 성역임을 일컫는 말이다.
충절은 선비의 의리정신에서 나왔으며, 이 의리정신은 모든 도덕적 행위의 규범이 되었고 또 이 선비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서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강을 바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순흥의 향토자치제도로서 ‘향청(鄕廳)’, 상민의 자치 및 지위기구인 ‘초 군청’ 및 ‘경로소’가 있었는데 그 제도들은 고장사회를 보다 밝고 아름답게 가꿈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유향소’ 또는 ‘향소’라고도 일컫던 향청은 지방자치기관이며, 수령의 자문기관으로 서 최고 책임자를 향장이라 하였다. 향청에는 향장인 좌수일인, 별감이인이 있었다.
향장은 순흥 향교의 유림에서 추대하되 자격은 소수서원장․금성단장 그리고 경로소장을 역임한 덕망이 높은 원로여야 했다. 향장은 윤리기장․풍속정화 및 향사를 감시하고 정령을 민간에 전달, 민정을 대표하는 종신직이었다.
그리고 유향소를 중심으로 향촌지배체제를 종래의 이족(吏族)에서 사족(士族)주도형으로 대치시키고, 지방교육을 진흥시킴으로써 성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이바지하였다. 또 그들은 16세기 후반의 사림과는 달리 집권층의 비정을 비판하고 민중의 편에서 제도적 개혁과 민생의 향상을 위하여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역사적 사명을 다하였다.
3. 국가지정 문화재가 집중된 순흥면
“영주지역 선사~고구려시대 고분군 정밀문화재지표 조사”에서 밝혀진, 5~6세기의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영주지역의 고분군 숫자는 98개 고분군에 1,102개고분이 있다. 이곳 순흥에는 이 가운데 41개 곳에 683개 고분이 집중돼 있어 순흥을 고분도시로도 일컬어지고 있다.
특히 순흥과 같이 국보 1점과 보물 7점․사적 4곳․도지정문화재 20점 등 국가지정문화재가 집중되어 있는 읍면은 보기 드물다. 그 대표적인 곳이 소수서원이고, 그 다음으로 부석면의 부석사다.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중요한 유적은 이 지역에 산재한 고분이다.
1971년 이화여대가 발굴한 ‘어숙묘’는 남한의 유일한 벽화무덤이고, 1985년 대구대학교 박물관장 이명식교수가 발굴한 읍내리 벽화고분은 고구려풍의 벽화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다. 벽화의 내용도 풍부하여 당시의 회화사 및 생활사에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순흥지역의 첫 문화유적은 읍내리 산 29의 1에 있는 남한 유일의 고려식 채색벽화고분에서 시작된다. 길가에 얌전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 모형 고분의 둘레는 어른 걸음으로 약 50보 정도이다. 진짜 무덤은 이 모형고분에서 50m 쯤 떨어진 곳 비봉산 등성이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이 순흥고분벽화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다각도로 재조명하여 순흥고분의 미술사 및 문화적 가치를 높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벽화 고분의 내용은 순흥면사무소 옆 순흥향토박물관에서 사진으로 볼 수 있고, 나막신․손다리미 등등 109종 26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뿌리가 각각인 적송 두 그루가 한 몸으로 이루고 있는 ‘연리지송’이 있어 부부간의 애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일컬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보호수가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또 고려의 공민왕이 ‘흥주도호부’라는 현판을 직접 써 걸었다는, 당시 영남에서 으뜸의 누대였던 봉서루가 있어 순흥이 이 지역의 행정 중심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순흥의 원래토성은 ‘안씨․이씨․신씨․윤씨’ 등 넷 성이었으나, 이․신․윤씨등은 씨족의 영고성쇠를 알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그러나 단종복위사건 이후 이향하고 순흥 땅에 살지는 않으나, 유독 이곳을 관향으로 삼은 ‘순흥안씨’는 국내에서 유수한 저성으로 명문현벌(名門顯閥)을 자랑하는 씨족으로 크게 성장 발전하였다.
4. 토성 순흥안씨에서 신흥사대부 명문으로 성장
순흥은 고려후기에 이르러 인물 및 유교문화의 큰 숲이었고 깊은 샘이었다. 이곳 토성인 순흥안씨에서 안향․안문개․안축 삼가가 차례로 상경종사하자, 마침내 신흥사대부 집안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리고 안씨 일문에서는 여(麗)․원(元) 양국을 드나들면서 주자학을 전래하고 영남 북부에 새로운 문풍을 진작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가문은 대표적인 신흥사대부로서 당대의 문벌을 대표하던, 권부․이조년․이제현․이곡․정양생․정사도 등 가문과 학문적인 사우관계와 인척관계를 깊이 맺고 있었다.
또 고려말에 있어서 관직의 고하에 있지 않고 인품과 덕성 그리고 학문의 삼요소를 함께 갖춘 문성공 안향․문의공 안문개․문정공 안축․문경공 안보․문간공 안종원 등 제현이 동지공거 및 지공거를 역임하였으니, 과시가학(科試家學)의 연원을 입증할 뿐 아니라 문학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의정을 담당한 중요직의 하나였던,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안축․안보․안목․안원숭․안천선․안종원 등이 배출되었다.
순흥은 한국유학의 시발과 함께 그 중심지로 태어났고 한국서원의 효시인 소수서원이 면면히 공자․맹자의 도를 이어오다가, 최근에는 소수박물관․선비촌․선비문화수련원․청소년수련관 등이 병설된 것은 모두가 고려말 문성공․문의공․문정공을 위시한 대덕의 정신과 기맥을 계승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후손이 번창하여 혁세문벌로 발전하였는데 주로 재경세력으로 기호지방에 분포되었고, 재지세력(在地勢力)은 세조때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폐부와 함께 큰 타격을 받았다.
특히 이 고장이 낳은 역사의 큰 별인 회헌 안향(1243~1306)은 거의 끊어졌던 유교를 다시 일으켜 무신정권과 불교의 폐단으로부터 문사정치(文士政治)로 환원시켰다. 새로운 성리학을 열어 많은 명유석학을 배출함으로서 조선 500년의 도학적 문운과 국시 및 통치이념의 결정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고, 조선 성리학의 사상세계를 순흥의 향취와 함께 하고 있다. 또 문명을 중국에 떨친 안축․안보 형제 등 100여 년에 걸쳐 이곳 안씨 문중에서는 나라에 올려진 유현이며,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대를 이어 기라성을 이루었다.
특히 이곳을 관향으로 하는 순흥안씨는 국가 위기 때마다 충의지사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특히 한말에는 안상렬․안중근․안창호․안명근․안재홍․안무․안세환․안희제․안병찬(秉瓚)․안병찬(炳瓚) 등등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저명인사만도 수백에 이른다. 그리고 순흥은 고려말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로 교육가이면서 경세가인 회헌 안향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또 조선초에는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의거가 있어 문향인 동시에 절의(節義)의 향으로도 그 명성이 높은 곳이다.
5. 순흥면 읍내리는 영남 유일의 최초 ‘문화마을’
그리고 이곳은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조선 최초로 사학 최고의 민족교육 전당인 서원을 창건하였고, 나라에서 처음으로 사액한 소수서원이 있으며, 이웃 부석면에는 “의상대사”가 당나라의 ‘지엄삼장’의 문하에서 10년 수도하여 깨달은 화엄교학의 종찰이요, 신라호국의 사찰이었던 유명한 부석사(浮石寺)도 옛 순흥도호부 관내에 있었다.
순흥은 아름다운 자연과 이곳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원형대로 잘 보존 전승해 온 유서 깊은 고장으로, 1991년 9월 11일 문화체육부에서 전통문화 보호의 시책으로 지정한 읍내리는 영남 유일의 최초 ‘문화마을’로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 순흥은 유․무형의 많은 유․불 문화의 원형유산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우리나라 도학과 전통문화의 제일향이요, 또 단종 절신들의 집합처로 충효문화의 민족정신 유산인 선비정신의 산실처며, 선비문화의 본향으로 한결 감회를 현실감 있게 더욱 깊게 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자랑스런 문화의 고장 순흥에서 삶을 누리는 이들에겐 남다른 긍지와 자부심을 다시금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