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터와 세연지(洗硯池) |
안터라고 전해 내려오는 곳은 지금의 비봉산 신단소인 순흥안씨추원단의 바로 건너편이며, 이 곳은 학다리 마을로서 현재는 농가 몇 동이 남아 있다. 이 안터는 문성공 선조께서 태어나시고 자란 곳이며, 문헌에 나오는 술좌신향의 고지를 말하는 것과 우리 안문 일족들이 이곳에 집거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이 안터에서 가까운 곳에 세연지(洗硯池)가 있다. 이 조그마한 연못은 문성공께서 어릴 적에 공부하시며 벼루를 씻으시던 곳이다. 이 세연지는 1959년의 태풍과 산사태로 매몰되어 현재는 석천만 남아있고, 그 옆에 세연지비가 서 있다.
1655년에 세워진 순흥향려비문의 첫머리에는 이 세연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즉, “옛 순흥부 동쪽 백운동에 문성공을 모신 사당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른바 소수서원이 이곳이다. 또한 고을 남쪽에 안씨의 옛터가 있는데 사당에서 7리쯤 되며 그 곁에 조그만 연못이 있으니, 이를 세연지라고 하며 옛 사적으로 삼아오고 있으며, 지금도 사람들이 이 곳을 이야기하고 정의를 표하며 고사로 전해오고 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후학, 김동진 선생이 찬한 「회헌선생세연지비」의 비명 일부를 아래에 소개한다.
샘물 끊임없이 흘러 근원이 있으면 반드시 바다에 이르나니,
선생도 이와 같이 날도, 달도가고 또 갔도다.
두루 생각하고 힘쓰고 삼가서 옛 성현의 경계를 깨끗이 지켰어라.
평생의 심법이 옛 법도에 부합되어
천년 전 우리 나라에 참된 도리 근원을 일으켰구나.
송학산 높다 높고 남긴 풍도 마르지 않았으며
깨끗한 옛 못에는 물속에 맑고 환하도다.
여기서 추앙 사모하니 완연히 당시를 보는 듯 하여라.
2) 사현정(四賢井) |
사현정은 순흥면 읍내리 사현정동에 있는 우물이다. 이곳은 5세 제학공[碩]과 그의 아들 문정공[軸], 문경공[輔], 좨주공[輯]의 4부자(父子)가 잡수시던 우물로서, 이 우물물을 드시고 4부자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현인이 되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곳에는 1546년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 선생께서 비석을 세운 다음 110년후인 1656년에 순원군[應唱] 선조께서 다시 비석을 세웠고, 1821년에는 안동영장(安東營將) 성연(性淵)이 비각을 세웠고 1962년에는 후손 상규가 석단을 수축 조성하였으며, 1986년에는 경상북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받고 대대적인 보수 정화사업을 벌였으며, 1991년 3파 대종회에서는 후손 동준(4선 국회의원)이 찬하고 갑준(3선 국회의원)이 글씨를 쓴 순흥안씨사현기적비를 건립했다.
여기에 주세붕선생께서 처음 사현정비를 세울 때의 그 비문을 소개한다.
「고려 안선생 석께서는 순흥호장으로 등제하시고 은덕불사하니라, 축, 보, 집 세 아드님을 두셨으니 즉, 문정공, 문경공, 좨주공이시라, 삼공이다 과거에 오르시고 백중(伯仲)이 또 원나라 제과에 오르셨도다. 초에 문정공께서 두 아우를 가르치고, 두아우들이 아버지 섬기듯 하여 그 일가의 충효우제, 청백지풍(忠孝友悌, 淸白之風)이 지금껏 애연하게 청사에 흐르도다. 오호라, 이곳 그의 구정(舊井)에 소식으로 표각하여 후세로 하여금 사현(四賢)의 덕을 잊지 않게 함이라」
3) 영모암(永慕庵) |
영모암은 경북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서쪽에 지장산이 있는데 이곳에 순흥안씨 제1파의 파조이신 추밀공[永儒]의 묘소가 있다. 이미 설명한 대로 시조공의 묘소도 실전이 되었고 그 밑의 삼형제분 중 둘째(안영린), 셋째(안영화)분의 묘소도 모두 실전이 되었는데, 첫째분의 묘소만이 현존하고 있으니 우리 순흥안씨의 선조묘소로서는 가장 오래된 묘소이다. 그리고 이 묘소를 관리하는 재실이 있는데 이 재실이 바로 영모암이다.
추밀공께서는 서기 1202년 순흥 서남 평리촌에서 탄생하셔서 덕을 쌓아 아들인 태사공과 손자인 문성공(안향)을 두어서 후에 추밀원부사로 추봉되셨다. 그리고 영모암은 1558년 시조공(안자미)의 12대 손인 판결사 휘 상께서 영천군수로 부임했을 때 건축했다. 이 영모암의 묘소는 명당중의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시조공(안자미)의 12대 손인 판서 휘 위께서 찬한 비문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선고 추밀공의 상을 당하여 슬퍼한 나머지 해를 넘기고 달이 바뀌도록 장례를 거행하지 못하여 걱정하던 차 마침 이상한 사람이 그 상중에 애통하는 것을 보고 말하되, “내가 지리를 조금 아니 그대가 나를 믿고 따르겠는가” 하자 태사공이 이를 허락하고 드디어 함께 지장산에 가서 고루 답사하였으나, 그 자리를 말하지 않고 산에서 내려와서 말하되 “내 손부채를 그 산중에 두고 왔으니 가서 찾아올 수 있겠는가” 하기에 태사공이 홀로 그 곳에 가보니 부채가 정중에 놓아 있는데 상하 양끝이 좌향을 가리키는 것 같은지라 곧 깨닫고 그 끝을 표하여 산을 내려오니 그 사람은 온데 간데 없었다.
돌아와서 준비하여 장례를 행하였다. 그후 3년상이 끝난 후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차츰 올라 밀직부사를 거쳐 판도판서에 올랐으며 뒷날 태사문하시중에 추봉되었다……
정말 이 산소는 순흥안씨라면 각파를 초월하여 모두가 성묘하고 잘 받들어야 할 것이며, 영모암은 해마다 전국에서 모이는 자손들이 제사를 올리는 전날밤에 선조님들의 교훈을 되새기면서 규약을 배우고 또 숭조목족을 위하여 여러 가지를 강론한 전통있는 재실인 것이다.
4) 은덕재(隱德齋)와 봉모재 |
은덕재는 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 산21–번지에 있다. 이곳에는 5세이신 제학공[碩]의 묘소가 있고 이 묘소를 관리하는 재실이 은덕재이다. 이 묘소는 관향지 순흥에서는 추밀공(안영유) 묘소 다음으로 현존하는 오래된 묘소이다.
은덕재의 제학공께서는 1315년에 별세하신 것으로 추측되며, ‘역학등제 은덕불사(力學登第 隱德不仕)’로 사현정의 신화를 남기신 순흥안씨 가문을 일으키는 데 공이 크신 선조이시다.
본 묘소에는 최초 1439년에 판봉상시사로 있던 덕봉(德峯) 휘 질(耋 선조가 묘비를 건립했는데, 그로부터 18년 후에 금성대군의 사건이 일어나서 그 비는 잘려서 매몰된 것으로 추측되어 묘소를 알지 못했는데, 공의 11대손인 사촌공[德隣]께서 1592년 잘려진 비의 문자를 보고 찾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문간공[宗源]의 산소는 1394년에 돌아가시자 임진현 서국동에 묘소를 썼는데, 7년 후인 1401년에 관향지의 인접지인 봉화로 이장하였고, 2008년 다시 제학공 묘소 아래로 천장하였다.
당시에는 흥녕부원군 그리고 대제학을 지낸 문간공(안종원)의 묘소에는 신도비를 비롯하여 각종 석물 등 공신의 치산으로 손색이 없는 묘소로 이루어졌던 것이 기록에도 나와 있거니와 그 후 신도비를 비롯하여 석물 등 모든 것이 없어졌으니 이 또한 금성대군의 사건으로 인한 우리 안문의 피해로 볼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후 제3파의 양도공[景恭]파 종회에서 기적비를 세웠다. 『여사본전(麗史本傳)』에서는 문간공[宗源]의 성품에 대하여 “대범하고 무거우며 풍채가 맑고 명랑하며 부지런하고 공손하며 안존하고 자상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공은 노후에 집 뒤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쌍청당(雙淸堂)이라 하였고 이것을 호로 삼았다.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을 내어 대접하였는데 풍족하고 사치스럽게 하지 않고 예로써 우정을 극진히 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신선같은 자태를 상상할 수 있다. 고려 삼은의 한분인 목은 이색선생은 이에 시로써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삼월삼일 남촌에서 노네
가랑비 방울방울 구름은 두둥실
쌍청정의 사람 모습 옥과 같으네
배꽃 한송이 머리에 꽂았네
한잔 한잔 오가는 술잔
경치에 반해서 잠시 머무네
5) 용연서원(龍淵書院), 순흥향교(順興鄕校) |
순흥의 용연서원에는 태사공[孚], 문순공[于器], 문숙공(안목), 문혜공[元崇], 경질공[瑗], 판서공[從約] 선조를 모셔왔는데, 186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어 아직 복원을 못하고 있으며, 현판만은 안정면 대룡산에 있는 서파공 별묘(죽림사)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순흥읍내에 있는 순흥향교는 1398년 성균관 개설과 곧 이어 유향인 순흥에 우선적으로 세워졌다. 여기에서 순흥향교를 소개하는 것은 이 향교에 문성공선조께서 배향되어 있기 때문이다.
향교는 지방의 중등교육기관으로 즉 향토의 향사를 교육하는 곳이었다. 향교는 고려 인종 때에 처음으로 설립되었는데 중간에 유명무실한 때도 있었으나 이태조 원년에 각도의 안찰사에게 명하여 부, 목, 군, 현의 소재지에는 향교를 설립하도록 하여 어느 고을이고 간에 향교가 없는 고을은 거의 없다. 이 향교에는 공자를 모시는 동시에 동무(東廡, 서무(西廡 양무에 유공한 유현을 모셨는데 우리나라의 유현으로 18현인이 모셔져 있고 그 중의 한 분이 문성공 선조인 것이다.
참고로 18현인을 열거하면 신라 때의 설총, 최치원, 고려 때의 안향, 정몽주, 조선조 때의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등 열여덟 분이다.
고려 500년 역사에서 유현 두 분을 모셨는데 그중의 한 분이 바로 문성공 선조이고 보면, 우리순흥안씨는 큰 긍지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순흥안씨는 순흥향교 뿐만 아니라 전국의 361개에 달하는 어느 향교에 가도 문성공 선조께서 배향되어 있기 때문에, 향교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을 갖고 참배도 하고 향교행사에는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이다.
6) 봉서루(鳳棲樓) |
봉서루는 순흥의 구학교에 있다가 불이나서 소멸되고 순흥면사소내에 있었는데 2005년 원래의 위치인 구학교에 증건하였으며 근재 선조께서 지으신 봉서루 중영기와 1830년 서성열 진사의 중수기가 있으며 2005년 본래의 위치에 증건하므로서 순흥준씨의 중건기 현판이 있다.
봉서루라 함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순흥의 진산(鎭山)으로 한 지방을 진정한다는 명산, 예, 서울의 북악산)의 이름이 비봉산으로 봉이 나는 형국인 고로, 봉이날아가 버리면 순흥의 지령이 쇠퇴한다고 하여 봉이 날아가 버리지 않고 깃들게 하기 위하여 누각을 세워 그 이름을 봉서루 즉, 봉이 깃드는 누각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누각의 북편에 타원형 즉 봉의 알처럼 도형하여 팔각정을 세우고 봉도정이라 부르고 있다. 즉 봉이 알을 두고는 날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관향지의 옛 선인들의 향토애를 우리는 이런 것에서 느낄 수가 있다.
7) 패도와 피끈이 |
패도(貝島)라는 소위 섬과 피끈이라는 동네는 순흥에서 영주로 가는 길가에 있다. 이조 때의 세조는 자기의 아우 금성대군이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었다하여 순흥땅의 패도로 유배를 시켰다. 금성대군이 순흥으로 유배됨으로써 우리 순흥안문은 엄청난 화를 입게 되었기 때문에, 이 패도는 우리 안문으로서는 잊을 수없는 곳이다.
패도는 순흥에서 ‘피끈이’라는 동네 조금 못가서 논 한가운데 둘레 4.5미터, 높이 1.5미터 정도 되는 큰 무덤만한 봉우리가 있고, 여기에 소나무 몇 그루가 서있는데 이것이 패도 즉, 조개섬이라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조개만하다 하여 조개섬이라 했고, 또 저것이 섬이냐 하는 뜻에서 조개섬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누가 보아도 그 섬이 유배지가 못 되는데 당시 지도상에 나타난 패도를 빙자하여 금성대군이 귀양살이를 오게 되었고, 이로인해 우리 안문이 큰 수난을 겪게 된 것이다.
금성대군이 실제 귀양살이를 한 곳은 지금의 소수서원 건너편이고, 지금 금성단(錦城壇)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이 금성단에는 금성대군과 당시 이에 동조한 의사 일동을 모신 단이 있고 유림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피끈이에 대해서는 우리 안문의 수난의 역사에서도 자세히 언급했거니와 금성대군과 이보흠부사가 단종복위를 모의하다가 사전 발각되어 안동의 관군이 들이칠 때 대가(大家)는 무조건 불지르고 사람은 닥치는 대로 무참히 타살되었다. 이들이 철수한 뒤에는 한양의 철기부대(기병–특공대)가 내려와 순흥을 쑥밭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때 그곳의 호족이던 우리 순흥안씨는 큰 참화를 입었다.
그 당시 벼슬에 오른 집(사대부가)만도 72호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했는지 순흥을 흐르고 있는 시냇물(죽계천)이 핏물로 변하여 그 피가 10리(4km)를 흘러 동촌이라는 동네 앞에 와서야 피가 끊어졌다 하여, 그 동네 이름을 ‘피끈이’라고 하는 명칭이 생겼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우리는 패도(조개섬) ․ 피끈이 ․ 금성단을 우리 안문의 수난의 유적지로 기억하지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