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1395-1446)는 세종 때 좌의정에 오른 소의공파 파조인 안천보(安天保)의 외손녀이다. 공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안수산은 소헌왕후의 외삼촌으로 영의정이 되었고, 딸은 세종비 소헌왕후의 친모이다.
소헌왕후는 태종의 며느리 되고 세종의 정비이고, 단종의 할머니가 된다. 세종의 18명 아들 중에 소헌왕후는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문종이고, 차남은 세조가 된다. 셋째 안평대군, 넷째 임영대군, 다섯째 광평대군, 여섯째 금성대군, 일곱째 평원대군, 여덟째 영응대군을 두었고, 정소공주와 정의공주를 두었다. 특히 차남 세조와 여섯째 금성대군과 단종은 우리 안문과는 역사적으로 통한의 역사를 갖고 있다.
폐세자에 이은 태종의 신속한 양위로 세종은 세자로 책봉된 지 두 달만에 국왕이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상왕 태종이 쥐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태종은 장차 세종의 안정된 통치기반을 갖춰주기 위해 사돈 심온의 거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조짐은 강상인의 옥사에서 시작되었다.
세종이 보위에 오른 지 불과 보름 후인 1418년(세종 원년) 8월 25일 상왕 태종은 궐내의 군사업무를 세종에게만 보고했다는 이유로 병조 참판 강상인과 병조 좌랑 채지지를 유배형에 처했다. 사건은 그것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해 9월 1일 영의정부사에 임명된 심온이 세종 등극의 고명 사신이 되어 명나라로 향했다. 그때 많은 중신들이 그를 전송했다는 소리를 들은 태종은 눈살을 찌푸렸다. 심온은 대사헌, 형조 판서, 호조 판서를 역임하고 한성 판윤, 의정부 참찬, 좌군도총제, 이조 판서를 지내는 등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다 세종의 등극과 함께 44세의 나이로 영의정부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심덕부는 개국공신으로 정종 때 좌의정을 지냈고, 그의 막내 아들 심종은 태조의 딸 경선공주와 혼인했으므로 태종과 심온은 처남, 매부 사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태종은 심온이 영민한 데다 국왕의 장인이 되었으니 장차 세종을 쥐고 흔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안천보 공은 시조공(안자미)의 7세이고 양정공의 차남으로서, 자는 정지이고, 시호는 소의공(昭懿公)이다. 1365년(공민왕 때) 별장이 된 후 전객부령 등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전서에 올랐으며 고려가 망하자 16년 동안 독서와 거문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1408년 조선조 태종의 부르심을 받아 검교 한성윤, 검교찬성을 지내고, 1425년(세종 7년)에는 광록대부 좌의정 자리에 올랐다.
공은 본래 마음가짐이 곧고 충성스러웠으며 왕실의 인척이 됨에 이르러서는 더욱 행동과 처신을 삼가시어 교만한 빛이 전혀 없었다. 병환에 계실 때 아드님이 약 탕관을 올리니 “인생 80이 세상에 흔히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약을 먹어 무엇하겠는가” 하고 소연히 87세에 돌아가셨다.
이 소식을 듣고 궁중에서는 3일간 궁중사무를 폐하고 시호를 용모와 의표가 공손하고 아름답다 하여 소(昭)라 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현명하고 착한 것을 의(懿)라 하여 소의공(昭懿公)으로 내렸다. 소헌왕후는 외척을 제거하고자 한 태종의 칼날을 피하지 못한 채 아버지 심온 때문에 폐서인이 될 뻔했으나 세종에 대한 내조의 공이 크게 인정되어 폐서인은 면하게 되었다.
유정현과 박은은 역신의 딸인 중전을 폐하라고 주청하자 태종은 평민의 딸도 시집을 가면 본가의 죄에 연좌되지 않는 법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중전의 가문을 멸문시켰으나 장차 외척의 전횡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의 본관은 청송으로 문하시중 심덕부의 손녀이고 영의정 심온의 딸이다. 1408년 충녕군 도와 가례를 올려 빈이 되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1417년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지고 이듬해 6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8월에 내선을 받아 세종이 즉위하자 12월에 왕후로 책봉되어 공비로 불려졌다. 하지만 1432년에 중전에게 별칭을 붙이는 것이 관습에 없다 하여 공비라는 호칭은 없어지고 그냥 왕비로 개봉되었다.
1418년 9월 19일 소헌왕후가 셋째 아들 이용을 낳아 왕실이 경사로 들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태종은 측근들과 함께 심온 제거작전에 골몰했다. 11월 3일 태종은 과거 강상인 사건을 재론하면서 그와 심온과의 연관성을 캐내라고 명령했다. 곧 단천에 유배되어 있던 강상인과 고부에 있던 박습, 사천에 있던 채지지, 무장에 있던 이각 등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윽고 박은이 나서서 가혹한 국문을 행하자 결국 강상인의 입에서 심온, 이종무, 이원 등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태종은 강상인과 심온의 관계만을 집중 추궁하게 했다.
국문을 마친 박은은 심온이 권력을 전횡하여 상왕을 욕보였다고 보고했다. 그자리에 배석하고 있던 세종은 박은의 말에 논리가 맞지 않음을 지적했지만 태종은 막무가내로 역모라 우기면서 심온 가문에 대한 일대 숙청을 명했다. 곧 심온의 동생 병조판서 심정이 잡혀 들어와 가혹한 고문 끝에 참살당했고, 세종의 장모 안씨는 의정부의 여종으로 전락했다. 이어서 11월 25일 강상인은 공개적으로 거열형에 처해 졌으며 박습은 참수되었다.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극을 알리 없었던 심온은 명나라에서 세종의 고명을 받고 돌아오다가 의주에서 체포되었다. 그로부터 한달 뒤인 12월 22일 한양으로 압송된 심온은 가혹한 국문을 당한 뒤 사사되었다.
이 사건은 심온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걱정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이 무고한 것으로 밝혀져 세종 때 관직이 복구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심온은 죽으면서 박씨와는 결혼하지 말라고 유언하여 오랫동안 지켜져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