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조는 9세 종검(從儉)으로 4세인 문성공(文成公 諱 珦)의 5대손이며, 경질공(諱 瑗)의 6남이다. 참의공은 통정대부 공조참의를 지내셨다. 도산 안창호(安昌浩)선생이 참의공 후손이다.
참의공파(參議公派)의 역사
1. 참의공파(參議公派)의 유래
참의공 파조는 휘 종검(從儉)이다. 원(8世, 경질공)의 여섯째아들(막내)이고 판서공(9世, 종약)의 다섯째 아우이다. 공의 조고는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을 지냈으며, 순성군에 봉해진 문혜공 휘 원숭이시다. 참의공은 통정대부 공조참의(通政大夫 工曹參議)의 벼슬을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파평윤씨(淑夫人 坡平尹氏)이다.
목사 장(蔣)의 딸이며, 증조는 대언(代言) 윤안귤(尹安橘)이다. 後配는 숙부인 재령강씨(淑夫人 載寧康氏)로 감무(監務)인 안식(安式)의 딸이다. 묘소는 기록상으로 경기도 양주 건천동이라 되어 있으나 찾지 못하고 失傳되었다. 경상북도 달성군 금단(琴丹)리 왕옥산에 아드님이신 준(浚)과함께 설단하였다. (병자년: 서기 1936년 윤삼월) [서기 2000년 현재의 행정명칭: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검단동파출소 뒷산] 歲祀는 음력 10월 4일에 올렸으나 후손들의 편의를 위해 음력10월1일이 지난 첫 번째일 요일로정해 올리고 있다 슬하에 사용(司勇) 벼슬을 지낸 준(浚)과 딸 다섯이 있다.
참의공파의 상대(上代)
공의 고조 휘 우기(于器)께서는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문순공(文順公)이시다. 증조부 목(牧)께서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문숙공(文淑公)이다. 조부 원승(元崇)께서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순성군(順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문혜공(文惠公)이시다.
부친 경질공께서는 여조에 등제하여 벼슬이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이르고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천도(遷都)하고자 하는 것을 공은 술사(術士)들의 망탄(妄誕)함을 힘써 진술하여 왕은 이에 좇았다. 공양왕 4년(1392)에는 말한 일이 임금의 뜻을 어겼다 하여 외처로 유배되었다. 조선조에 태조가 누차 벼슬을 내렸으나 배명하지 아니하고 한성으로 도읍을 옮김에 미쳐 임금이 굳이 공을 고도(故都)의 유후(留後)로 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아 후임에 형조전서(刑曹典書)를 내렸지만, 또한 벼슬하지 아니하고 졸하시었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니 의(義)로 말미암아서 제세(濟世)하니 경(景)이요, 명(名)과 실(實)이 어긋나지 않으니 질(質)이라 하다.
부친 경질공께서는 먼저 판서 남휘주(南輝珠)의 따님에 장가들어 종약(從約)을 낳아 목사(牧使)를 지내고 판서(判書)에 증직되었다. 후취 영평군(鈴平君) 윤척(尹陟)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5남 5녀를 낳아 종례(從禮)는 감찰이요, 종의(從義)는 첨추(僉樞)요, 종렴(從廉)은 도정(都正)이요, 종신(從信)은 경력(經歷)을 지내고 증 병조참판(兵曹參判)이요, 종검(從儉)은 참의(參議)이다.
참의공파의 빛나는 후손들
① 안극함(安克?)
안공 휘 극함(克?)께서는 시조공으로부터 11세손으로, 자는 자성(子誠)이시다.
공의 출생년도는 불분명하며, 병조참판 준(浚)의 아드님이시다. 1625년(인조3) 무과에 급제,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이립(李立)과 함께 용천(龍川)의 소위포(少爲浦)에서 후금군(後金軍)의 배후를 위협하는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또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1島)에 진을 치고 요동(遼東) 수복작전을 펴고 있던 명나라 장군 모문룡(毛文龍)을 도와 활약한 공으로 훈련원부정이 되었고, 명나라로부터는 의병장의 은자패(銀子牌)와 1,000석의 쌀을 하사받았다.
1641년 최효일(崔孝一)?차예량(車禮亮) 등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명나라를 도울 것을 모의, 먼저 최효일과 차예량을 등주(登州)에 보내고, 뒤에 압록강을 건너려다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청나라에 벼슬하고 있던 역관 정명수(鄭命壽)에게 발각되어 서울로 잡혀와 처형되었으니, 서기 1641년(인조 19년)이다. 후에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의주의 백마산성사(白馬山城祠)와 현충사(顯忠祠)에 제향되었다.
② 안억(安億)
통정대부 의성현령(義城縣令) 안공(安公) 억(億)께서는 시조공으로부터 16세손이시다. 고려 상호군 자미(子美)가 비조(鼻祖)이다. 3대가 전해져 유(裕)에 이르러 성리학을 제일 먼저 창도하여 공자의 사당에 배향이 되는데 이 분이 바로 문성공 회헌선생(晦軒先生)이다. 문순공(文順公) 죽옥선생(竹屋先生) 우기(于器), 문숙공(文淑公) 겸재선생(謙齋先生) 목(牧), 문혜공(文惠公) 원숭(元崇)은 모두 넓은 학문과 위대한 공렬로 순흥에 채읍을 받았다. 전서(典書) 경질공(景質公) 원(瑗)은 고려가 망하자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의리를 지켰다.
참의(參議) 종검(從儉), 사용(司勇) 준(浚), 사직(司直) 극량(克良), 습독(習讀) 린(璘)은 공의 위로 4세(世)이다. 증조 경지(景祉), 조부 기(琦), 부친 세달(世達)은 모두 산림에 은거하였다.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사직(司直) 사일(士一)이 그의 부친이다. 빼어난 범절이 있는데 중조 계미(1523년) 양주리(楊州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기운이 맑고 품성이 단정하며 행동이 두루 막힘이 없었고 모든 것들이 법도에 맞아 털끝만큼의 받고 주는 것도 반드시 의에 맞았다. 양주에서 동래(東萊)로 옮겨 지내면서 두문불출하고 옳음을 행하여 원근에서 모두 훌륭한 덕이라고 추존하였다. 뒤에 문의(文義), 옥구(沃溝), 의성현령(義城縣令)을 역임하며 치적을 갖추었다. 선조 무자(1588년)에 정침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 66세였다. 아내는 숙부인(淑夫人) 동래정씨로 가선(嘉善) 정윤(定潤)의 따님이다. 아내의 범절이 지극하여 하관(下棺)하면서 노례(魯禮)로써 하였다.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성호(成好) 참봉(參奉), 둘째 아들은 성열(性悅), 셋째 아들은 성용(成龍) 진사(進士), 넷째 아들은 성국(成國)이다. 성호의 아들은 몽남(夢男), 몽득(夢得) 참봉, 성열(成悅)의 아들은 몽성(夢星) 가선(嘉善), 성용(成龍)의 아들은 몽린(夢麟), 성국(成國)의 아들은 몽생(夢生)이다.
③ 도산 안창호
도산 안공 휘 창호께서는 참의공파의 후손으로 평남 강서군 초리면 사람이시며, 호는 도산(島山)이시다. 대동강하류 도룡섬에서 출생하여 18세때 평양 쾌재정 독립협회 지회설립 석상에서 연설하여 갈채를 받았고, 서기 1898년 이상재(李商在), 윤치호(尹致昊) 등과 독립협회 운동을 계속하였다.
다음 해에 도미(渡美)하여 공립협회를 설립하고 교민지도에 힘썼고, 다음해 귀국하여 이갑(李甲), 전덕기(全德基) 등과 신민회를 조직, 평양에 대성중학과 마산동에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설립하고 각 도시에 태극서관을 배치하였다. 서기 1908년에 청년학우회를 조직, 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홍사단을 조직하고 국민회운동에 전심하다가 3?운동후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을 역임하였다. 서기 1932년 체포되어 서대문과 대전옥에서 3년형을 받고 복역 중, 익년 6월 동우회 사건으로 동지 수백 명과 함께 서대문감옥에서 옥고중 병보석 되어, 서기1938년 3월 10일 서거하였다
서기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