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조는 8세 조동(祖同)으로 4세인 문성공(文成公 諱 珦)의 현손이며, 문혜공(諱 元崇)의 차남이다. 고려 충목왕 1년(1345)에 출생하였으며, 우왕 2년(1376)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거쳐 대언(臺言)에 오르고 예문관 제학이 되셨다. 도덕과 학문이 뛰어나고 인품이 고상하여 회헌(晦軒) 선조같다고 하여 우왕이 ‘조동’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대궐로들어오는 것을 숭인문에서 막지 못하고 순절하셨다. 시호가 양공공(良恭公)으로 내려졌고, 일명 제학공파(提學公派)라고도 한다.
양공공파(良恭公派)의 역사
1. 양공공파의 유래
양공공(良恭公 祖同 1345~1388)은 추밀공파 8세로 양공공파 시조이다.
양공공은 고려말 우왕(禑王) 때 봉의대부(奉議大夫) 예문관(藝文館) 부제학(副提學)을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양공공(良恭公)이고, 초휘(初諱 첫 번째 이름)는 전해지지 않으며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처음 들여와서 성리학을 꽃피게 한 고조 문성공 회헌(晦軒) 안자(安子 ; 安珦, 安裕)의 학문과 덕행, 인품이 똑같이 훌륭하다 하여 우왕이 조동(祖同)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양공공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을유년(1345년)에 출생하여 우왕(禑王) 병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주서(門下注書 종칠품), 사헌지평(司憲持平 종오품), 한림(翰林 정사품)을 지내고, 지부(知部 종삼품), 대언(代言 정삼품)에 올라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藝文館副提學 정삼품)에 이르렀다.
시호 양공공(良恭公)은 온량공검양(溫良恭儉讓)을 의미하는데, 온화하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절검하고 겸양한 분이라는 뜻이다. 양(良)은 온량호악(溫良好樂 따뜻하고 좋아서 기쁘고 즐거움) 중심경사(中心敬事 중심이 있고 공경스럽게 일함), 공(恭)은 경사공상(敬事供上 공경스럽게 일하고 임금을 받듬) 존현귀의(尊賢貴義 어진 사람을 존경하고 의리를 귀하게 여김)의 뜻이다.
공은 서원군부인(瑞原郡夫人) 염씨(廉氏) 사이에 고성군수(高城郡守) 금강(金剛), 수의교위우군사직(修義校尉右軍司直) 인강(仁剛), 예산현감(禮山縣監) 의강(義剛), 사정(司正) 종강(從剛) 4형제와 딸을 두었으나 딸은 족보에 수록되지 않았다. 장인은 보리공신 판개성부사 예문관대제학(종이품)을 지내고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진 염국보(廉國寶)이다.
1998년 통계에 의하면 양공공(良恭公)의 후손은 남자 기준 15,000명이다. 음력 10월 4일 후손들이 원모재에 모여서 종회를 하고, 10월 5일 세향을 올린다.
1993년 3월 1권 1120쪽, 2권 1198쪽, 3권 1236쪽, 4권 360쪽의 4권 1질의 양공공 파보를 냈는데 편집은 치연(致衍), 총무는 승옥(承玉)이 맡아서 농경출판사에서 발행하였다.
원모재(遠慕齋)
원모재는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老山里) 장산(獐山 노산)에 있으며 1928년에 양공공(良恭公)의 재실로 지었다.
1990년에 증건하였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이다.
2칸 마루방 좌우에 2간방과 1간방을 배치하고 앞마루를 놓고 원모재(遠慕齋)현판을 걸고 마당 앞으로 솟을 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음력 10월 4일회의시 사용하며 10월 5일 세향 때 비가 오면 위패를 모시고 세향을 올린다.
원모재 정문은 성인문(成仁門) 현판이 걸려 있고 원모재 동쪽 장산 자좌에 양공공 묘와 군부인 서원염씨를 합폄(合?합장)한 신도비가 있고 묘역 아래에 순흥안씨천(順興安氏阡) 비석이 있다.
묘갈문은 봉의대부 예문관부제학휘조동지묘(奉議大夫藝文?5副提學諱祖同之墓)로, 1905년 승지 안동 김영한(安東金?5漢)이 썼다.
양공공신도비는 양공공산소 서쪽 자락에 있으며 1990년 자유중국의 공자 77대손 공덕성(孔德成) 공이 썼다.
2. 양공공파 분파도
충남 천원군 목천면 갈전리에서 노산리 장산 양공공 산소 밑으로 이장하였는데 묘비는 ‘수의교위행우군사직부군휘인강지묘(修義校尉行右軍司直府君諱仁剛之墓)’라고 쓰여 있다. 임신년(壬申1992) 계춘(季春) 원임성균관장 밀양후인 박중훈(原任成均館長 密陽後人朴重勳)이 짓고 후손 광호(珖鎬)가 썼다. 배위는 안동김씨이다.
충남 천원군 목천면 갈전리에서 노산리 장산양공공 산소 밑으로 이장하였는데 묘비는 ‘사과순흥안공휘우효지묘(司果順興安公友孝之墓)’로 쓰여 있고 비문은 없다. 배위는 연안이씨이다.
양공공 산소 아래에 있으며 비는 ‘수의부위사맹순흥안공사맹철동지묘(修義副尉司猛順興安公哲童之墓)’로 쓰여 있다. 배위는 초계정씨이며, 세현, 세문 세량 삼형제를 두었다.
세현공은 사직공의 맏증손으로 비는 통훈대부행진천현감세현지묘(通訓大夫行鎭川縣監順興安公諱世賢之墓)라고 쓰여 있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 시동리에 있으며 단기 4310년(1977) 2월 그믐 15대손 승갑(承甲)이 글을 썼다. 배위는 단천허씨로 산소는 죽전리 삼성골에 있다.
세현공은 조선 중종조(中宗朝)에 현도면 죽전리에 자리를 잡고 후세를 가르칠 때 조정에서 진천현감(종6품, 군수)을 제수하였으나 마다하고 전원에 대나무를 심고 은둔생활을 하며 살았다 하여 살던 곳을 대밭, 즉 죽전리(竹田里)라고 하게 되었다. 세현공 후손은 현도면 죽전리 삼성골과 모약골, 충남연기군 동면 합강 등에서 번성하였다. 안희정 충청남도지사도 세현공의 죽전리 모약골파 후손이다.
(1) 장남 군수공 분파도
(2) 차남 사직공 분파도
왼쪽 끝 마을회관 뒤가 세현공이 살던 대밭자리이다. 삼성골(三省洞)은 세현공 후손 집성촌으로 오른쪽 붉은 건물은 삼성골파 재실이다. 증자는 하루 3번 반성하라는 교훈(三省吾身)을 내렸는데 삼성골이라는 지명은 증자의 교훈을 본받으라는 의미이다. 조선 정조대왕(正祖大王)은 일일삼성(一日三省)을 실천하기 위하여 일성록(日省錄) 이라는 일지를 매일 썼다. 그래서 삼성골 안씨 선비들은 성재(省齋 安敎益), 우성(又省 安晟鎬), 재성(再省 安承學)과 같이 호에 성(省)자를 넣어 가르침을 따랐다.
학이 날개를 펴고 춤추는 형국이라고 하여 한자로는 무학동(舞鶴洞) 이라고 한다. 무학골이 변하여 모약골로 되었으며, 모약골은 세현공 후손 모약골파 집성촌으로 충청남도 안희정 지사도 후손이다.
세량공은 사직공의 손자 철동의 3남으로 산소는 충북 청원군 현도면 죽전 3리 삼성골에 있으며 비는 천문학습독순흥안공휘세량지묘(天文學習讀順興安公諱世良之墓)로 쓰여 있고 정유년 (1957)에 13대손 교창(敎昌)이 글을 썼다. 배위는 임천조씨이다.
세량공은 우록리에 자리를 잡았는데 고려가 망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연못을 파고, 매화나무를 심고, 정자를 짓고 사슴과 벗하며 노닐었다고 하여 살던 곳을 우록리(右鹿里)라고 하게 되었고 세현공이 만든 연못과 정자가 있던 곳은 지정말(池亭村), 매화나무를 심은 곳은 매차울(梅洞)이라고 하며 뒷산에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명당자리가 있다. 세량공의 후손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 우록 1리에 세거하여 번성하였다.
세량공이 살던 곳으로 왼쪽 끝이 매차울, 왼쪽 마을이 큰말, 오른쪽 마을이 지정말이다.
안희정 지사의 당숙, 6촌, 종손 덕기 등이 살고있다.
가운데 전봇대 길 삼거리 산 10m 위에 안희정 지사 조부 승규공(承圭公) 산소가 있다.
(3) 3남 봉례공 분파도
(4) 4남 사정공 분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