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조는 8세 수(垂)이고, 4세인 문성공(文成公 諱 珦)의 현손이며, 문혜공(諱 元崇)의 3남이다.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출생하셨고, 일명 수(隨)라고도 하며, 공민왕 23년(1374)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의랑(禮儀郞)을 거쳐 한림지제교를 역임하셨다. 고려가 망하자 종적을 감추시어 사적도 묘소도 알 수 없다. 아직 세사단소도 세우지 못하였다.
한림공파(翰林公派)의 역사
1. 한림공파의 유래
한림공파의 파조의 휘는 수(垂)이다. 한편으로 ‘수(隨)’라고 하였으니, 순원군(順原君 응창(應昌))이 편찬한 기해보(己亥譜)에서 “隨 一作垂”라고 나와 있다.
자는 실전이다. 공은 문혜공(文惠公) 원숭(元崇)의 제3자이다. 조부는 문숙공(文淑公) 목(牧)이고, 증조는 문순공(文順公) 우기(于器)이고, 고조는 문성공(文成公) 향(珦)이다. 어머니는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이다.
1350년 출생하였고, 1374년 공민왕 갑인년에 급제하여 예의랑(禮儀郞) 한림지제고(翰林知制誥)를 지냈다. 부인은 경주이씨(慶州李氏) 준(?의 따님이다. 몰년은 미상이고, 묘소는 모두 실전이다.
공은 문성공의 현손으로서 대대로 관벌과 문한(文翰)이 성대한 가문에서 태어나, 경질공(景質公) 원(瑗)과 양공공(良恭公) 조동(祖同)이 형님이고, 우사간 광산(光山) 김사렴(金士廉)?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 기륜(奇輪)?좌의정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이 자형(姉兄)이었으니, 명문 가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공의 활동 당시는 조선조의 혁명 과도기로서 두 형님이 혁명에 참여하지 않아 곤액을 당한 것이 역사 기록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볼 때 공께서도 같은 길을 택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들 미로(彌老)는 감찰을 지내고 조선조에서 전중(殿中)에 제수하고 불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충원(忠原) 산중으로 숨어들어 이름을 민로(民老)로 고치고 종적을 감추고 살았다고 하였다. 손자 별제 승석(承碩)은 맹산(孟山)에서 은둔하였고 정광 을귀(乙貴)는 길주(吉州)로 들어가 살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자손들이 먼 지방으로 중국 길림성까지 흩어져 살았다.
참의 지석(至碩), 참의 근(王?, 중사간 석(錫), 참의 희, 득경이 있다. 공에 대한 사적이 대다수 민멸된 것으로 보인다.
2. 한림공파의 분파도
3. 한림공파의 빛나는 후손들
(1) 안상철(安相喆)
공은 한림공의 차자(次子)로 병조판사를 지냈다. 태종 원년에 난리로 인하여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형기(刑期)가 만료되어 경기도 광주로 돌아왔으나 자식들과 떨어져 같이 살지 못하고 돌아간 해도 알지 못한다. 광주 돌마(廣州 突馬)에서 살기 시작한 이전의 기록은 없어졌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남평 문씨(南平文氏)이며, 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 치정(致貞)이다. 아들은 득경(得敬)을 두었다.
(2) 안득경(安得敬)
공은 한림공의 손자이며, 부친은 안공 상철(相喆)이시다. 아버지가 제주도에서 경기도 광주로 옮길 때, 같이 따라가지 않고 제주도에 영구히 남아 제주도의 입향시조가 되셨다. 벼슬은 수의부위 충무위사직(修義副尉 忠武衛司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경주최씨(慶州崔氏)로, 부친은 어모장군(禦侮將軍) 경(京)이다. 제주시 후손들의 헌성과 공칠 회장의 노력으로 한림읍에 相喆公의 추모단비를 건립하였으며, 음력 3월 13일전 일요일에 시제를 봉행하며, 제주에 200여세대의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3) 안처양(安處良)
공은 시조공으로부터 13세손이며, 한림공의 6세손이다. 자(字)는 선보(善甫)이며, 공은 예조참판 겸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가정대부(嘉靖大夫)이다. 연산 을축 12월 29일에 돌아가시었다. 묘는 입암면(立岩面) 용산 왕자성 갑좌(龍山王子星 甲坐)에 있으며 묘갈(墓碣)이 있다. 배는 정부인(貞夫人) 남양 홍씨이다. 묘는 해좌(亥坐)에 있으며 묘갈이 있다.
공은 두 아들 경복(景福), 경록(景祿)이 있고, 장자 경복공은 통훈역 천안무주부사(通訓歷天安茂州府使)를 지냈으며 묘는 선영 오른쪽 산등성이 임좌(壬坐)에 있으며, 묘갈이 있다. 제사는 용산 선영의 시제일에 봉행한다.
차자 경록공은 자가 옥정(玉貞)이며 영동현감을 지냈다. 배는 전주이씨로, 묘는 옥천 양남당곡(陽南當谷)에서 음력 10월 10일에 시제를 봉행하고 있다.
(4) 그 밖의 후손들
그 밖의 후손들은 제주시, 경남거창, 전남승주, 광주광역시, 여수, 정읍, 부산, 울산, 경기파주, 충북영동, 무풍, 충남, 함경도 길주, 중국 길림성 등지에 분포되어있으며, 현대인물에는 성균관대 학장을 지낸 병주(?I周) 철학박사, 감사원 사무총장을 지낸 번일(繁一), 경제기획원에 도걸(道杰), 대우에 정화(廷和) 등이 중역으로 근무 중에 있다.
4. 한림공의 교유(交遊) 기록
한림공의 당시 기록물은 거의 남겨져 있지 않고,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그아우인 권우(權遇)와 교유한 시에서 발견되고 있다.
(1)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교유한 시
안 교감 수(安校勘 垂)의 집에서 취해 돌아오다 [安校勘 垂 宅醉歸] 『陽村先生文集 卷2』
醉揷花枝入夜歸 취해 꽃가지를 꽂고 밤중에 돌아오니
馬蹄泥汚木綿 말굽의 진흙이 무명옷을 더럽히네
一年春事無餘日 이 해라 봄날도 남은 날이 며칠인고
忍見朝來落蕊飛 아침나절 휘날리는 버들 솜을 참고 보리라
(2) 권우(權遇)와 교유한 시
유학교수(儒學敎授)가 되어 서도(西都)로 부임하는 안의랑(安議郞)을 전송함
[送安議郞爲儒學敎授赴西都] 『권우(權遇), 梅軒先生集 卷4』
西都自是古朝鮮 서도는 본래 옛날 조선
箕子來封史已傳 기자가 와서 봉해진 것이 역사에 전하네
洪範本因書出洛 홍범은 본래 하도낙서에 나왔으니
彝倫永與日中天 인륜이 중천의 해와 함께 영원하리
大同江上山如畫 대동강 가 산색은 그림과 같이 아름답고
浮碧樓前月正圓 부벽루 앞에 달이 둥글게 떠오르리니
君去應携童冠輩 그대 떠날 때 응당 소년들 데리고 갈 터이니
詠歸高興學先賢 시 읊으며 돌아오는 흥취 선현을 배우리라
위 두 편의 시로 보면, 당시 여말선초에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양촌 권근과 각별한 교유를 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권근(1352~1409)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학자. 문신. 조선 개국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의 사상은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론에 영향을 주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