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조는 10세 구(玖)로서 4세인 문성공(文成公 諱 珦)의 6대손이며, 판서공(判書公 諱 從約)의 장자이다.
조선 태종 17년(1417)에 진사시험에 장원하고 4월 경회루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들어가셨으며, 홍문관직제학, 통정 판군자감정에 오르셨고 세종 22년(1441)에 돌아가시니,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추증 받으셨고 그 후 가정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을 가증(加贈) 받으셨다.
참찬공파의 유래(1파)
참찬공파의 뿌리인 판서공파
순흥안씨 판서공파(判書公派) 파조는 판서공 휘(諱)종약(從約)이시다. 고려명현(名賢) 문성공 향(諱 珦) 선조의 5대손(孫)이다. 문성공의 증손인 경질공(景質公 諱 瑗)과 영양군부인(英陽郡夫人) 남(南)씨의 장자(長子)로 1355년(乙未 공민왕4)에 출생하시고, 1388년(戊辰)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셨다.
조선 초에 이조참의(吏曹參議 正三品)에 선발(選拔)되었으나 즐거워하지 않았고, 해주목사(海州牧使)를 끝으로 관직을 물러나서 서원(瑞原 지금의 파주)의 농막(農幕)에 머무셨다.
파주의 농막은 공(公)의 조부 문숙공(諱 牧) 대에 황무지였던 파주 일대를 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부친이신 경질공(諱 瑗)대에 창성(昌盛)했다. ‘순흥안씨 파주농장’은 넓기가 수만 경(數萬 頃 약 일억 평)에 달하고 노비가 사는 집이 백여 채가될 정도로 큰 농장이었다. 조선 태조가 한양의 경복궁이 완공될 때까지 6개월여를 거처했다는 기록(조선왕조실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큰 집이있었을 것이다.
파주 농장에서 금주(琴酒)와 시서(詩書)로 자적(自適)하며 세간사(世間事)를 멀리 하시다가 향년(享年) 70인 세종6년(1424년) 3월 8일에 일생을 마치시니, 장지(葬地)는 교하(交河) 아곡방 야동(阿谷坊 冶洞 지금의 파주시 야동동)이었다.
이후 증손(曾孫) 침(琛 판서)과 당(瑭 좌의정)의 귀현(貴顯)으로 증직(贈職)이 되니 이조판서(吏曹判書)이다. 겸하여 경연(經筵)과 춘추관(春秋館)과 성균관(成均館)과 의금부(義禁府)의 지사(知事),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과 예문관(禮文館) 대제학(大提學)을 추증(追贈) 받으셨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양도공(良度公) 양생(봉원부원군 良生)의 여(女)이다.
판서공은 4남2녀를 두셨다. 장남은 구(玖)로 직제학에 증직(贈職)이 참찬(參贊正二品)이고, 2남은 경(璟)으로 판윤(判尹)에 증직이 찬성(贊成 從1品)이며, 3남은 수(琇)로 직장(直長 從七品)이며, 4남은 리(理)로 군수(郡守 從四品)이다. 장녀는 성염조(成念祖 판서)와 혼인하였고, 2녀는 박수지(朴遂智 현감)에게 시집갔다.
세상이 칭(稱)하기를 ‘구ㆍ경ㆍ수ㆍ리(玖ㆍ璟ㆍ琇ㆍ理)'라 하는 판서공 종약(從約 10세)파 자손은 순흥안씨 순수 혈통(血統)을 이어왔고, 장자가 11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하는 대기록을 세운 문성공 자손의 적손(嫡孫)이다. 순흥안씨 최초의 족보 병오보(丙午1546년) 이래로 ‘문성공자손(文成公子孫)’으로 기록되다가, 자손이번성하여 여러 지파(支派)로 갈라지면서 판서공을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가 되었다.
☞. 파주 농장 또는 서원 별서는 신재 성현(1439~1504)이 쓴 수필집 『용재총화』에서 자신의 외가인 순흥안씨집안과 안목(1290~1360)에 의해 시작된 농장에 관한 기록과 외조 판서공 종약(1355~1424)과 가계기록이 나온다. 농장의 형성과 규모, 노비의 수, 신흥사대부 가문의 토지확대 과정을 볼 수 있다.
후손이 더욱 번성하여 종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므로 다른 지파와 비교가 되니, 무오보(戊午1918년)부터 판서공의 아드님 넷이 모두 파조가 되어 분리되었다.
곧 참찬공(玖)파, 찬성공(璟)파, 직장공(琇)파, 서파공(理)파이다.
판서공의 이복형제(異腹兄弟)인 종례(從禮 감찰공), 종의(從義 첨추공), 종렴(從廉 도정공), 종신(從信 참판공), 종검(從儉 참의공) 등 5형제도 모두 파조가 되었으니, 이들은 경질공의 계배(繼配)인 파평군부인(坡平郡夫人) 윤(尹)씨 소생이다.
판서공의 증조인 문숙공의 이복형제 신(愼)은 군부인(郡夫人) 이(李)씨 소생으로 판관공(判官公)파의 파조가 된다. 또한 경질공의 아우이자 판서공의 숙부가 되는 조동(祖同 양공공)과 수(垂 한림공)도 파조가 되어 순흥안씨 일파(一派)를 이루니, 이들은 모두 ‘문성공자손’이다.
순흥안씨 일파(一派 또는 추밀원부사공파) 곧 문성공자손이 14개로 분파된 다음에도 판서공파 종회(宗會)가 유지되고, 종원(宗員)들은 파주(坡州市 冶洞) 판서공의 묘소를 수호하는 일과 오공팔배위(五公八配位) 망배제(望拜祭)를 모셔왔다.
5공(五公)은 판서공의 부친이신 경질공(景質公 諱 瑗), 조(祖)인 문혜공(文惠公 휘 元崇), 증조(曾祖)인 문숙공(文淑公 휘 牧), 고조(高祖)인 문순공(文順公 휘于器)과 문성공(文成公 諱 珦)이시다. 8배위(八配位)는 영양군부인 남(南)씨, 파평군부인 윤(尹)씨(경질공), 진한국부인 원(元)씨(문혜공), 화평군부인 김(金)씨(문숙공), 철원군부인 최(崔)씨, 이(李)씨(문순공), 한남군부인 김(金)씨, 서원군부인 염(廉)씨(正一品)이시다.
아! 뿌리 깊은 나무에 잎이 무성하고 샘이 깊은 물은 흐름이 긴 것이니, 오 공(五公)은 ‘뿌리 깊은 나무’요 팔 배위(八配位)는 ‘샘이 깊은 물’이라 할 것이다.
문성공의 자손은 선조를 길이길이 추모하여야 한다. 이는 문성공의 후예(後裔)로 살아야 할 고귀한 자긍(自矜)이요, 한국의 명문(名門) 순흥안씨(順興安氏)를 영원히 이어가고 빛내야 할 자존(自尊)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참찬공파의 파조
안공 휘 구(玖)는 영락(永樂) 정유년(1417)에 진사(進士)에 오르고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으며, 얼마 안 되어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에 제수되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과 교리(校理)로 전직하였으며,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으로 옮겼다가 특별히 홍문관과 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으로 승진하였으며, 통정대부 판군자감사(通政大夫判軍資監事)로 올랐다.
뒤에 가선대부 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이는 아들 지귀(知歸)가 귀히 되었기 때문이었고, 뒤에 다시 가정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동지경연춘추관 성균관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嘉靖大夫議政府左參贊兼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에 추증되었으니, 이는 손자인 침(琛)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 문간공(文簡公) 유관(柳寬) 같은 여러분들이 모두 마음을 울여 공을 장려하여 공경의 큰 인물로 대우하였으며, 성상께서도 또한 장차 크게 등용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하찮은 병으로 별세하니, 정통(正統) 신유년(1441) 6월 26일이었다. 이에 9월에 광주(廣州)의 돌마방(突馬坊) 율리(栗里) 영장산(靈長山) 남쪽 간좌 곤향(艮坐坤向)의 땅에 장례하였다.
공은 문성공(文成公) 회헌선생(晦軒先生) 휘 향(珦)의 6대손이다. 부친의 휘는 종약(從約)이니 이조참의(吏曹參議)로 판서(判書)에 추증되었고 정직한 도(道)로 중망(重望)을 받았다. 조부 휘 원(瑗)은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지냈고 시호가 경질공(景質公)인데, 고려가 망하자 충절을 지켰다. 증조와 고조 이상은 대대로 여러 공경(公卿)이 이어져 유명한 분과 덕 있는 분이 많이 있다. 판서공은 동래정씨(東萊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그 부친은 봉원군(蓬原君) 양도공(良度公) 휘 양생(良生)이다. 부인은 정숙하고 규중의 법도가 있었다.
공은 홍무(洪武) 아무 해에 출생하였는데, 출생하면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일찍 학업을 이루었으며 장성하자,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하여 근원을 탐구하고 실제를 터득하여 진수(眞髓)를 얻었다.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이씨(李氏)는 공의 배필이었는데, 유순하고 착하였다. 장례는 노(魯)나라의 예(禮)를 사용하여 합장하였다. 부인은 종실(宗室)인 완천군(完川君) 숙(淑)의 따님인데,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의 손녀이다.
공은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지귀(知歸)는 대사성(大司成)이고, 지석(知碩)은 전서(典書)이며, 사위는 목사 허인(許認)과 직장(直長) 이경창(李景昌), 성문치(成文致), 남성군(南城君) 홍석(洪錫)이다. 지귀의 아들 호(瑚)는 참판(參判)이고, 선(璿)은 부정(副正)이며 침(琛)은 판서이고, 종(琮)은 군수이며, 기(璣)는 전적(典籍)이다. 지석의 아들 위(位)는 현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