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조는 10세 수(琇)로서 4세인 문성공(文成公 諱 珦)의 6대손이며, 판서공(判書公 諱 從約)의 3남이다. 공양왕 2년(1390)에 태어나셨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군자감직장을 하셨다. 벼슬을 그만두고는 경기도 파주에 거주하셨는데, 문장과 학행이 당세 명유로 지칭 받으셨다.
직장공의 당질인 정민공 안당(安瑭의 신사무옥으로 화가 미쳐오자 춘천으로 피신하였다가, 동생은 춘천에 남고 위 형들은 경남 함안으로 피난을 와서 그 후손들이 함안과 창원 등지에서 번성하고 있다.
직장공파(直長公派)의 역사(1파)
직장공파의 유래
순흥안씨 직장공파(直長公派)는 판서공(諱 從約 9세)의 3남이신 수(諱 琇 10세)공을 파조로 모시는 판서공파의 한 갈래이다. 동방의 대현(大賢)이신 문성공(文成公 諱 珦) 선조의 6대손으로 일찍이 직장(直長 從七品) 벼슬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셨기에 직장공파(直長公派)라 이름 한다.
판서공과 정부인(貞夫人) 동래 정씨(東萊鄭氏) 사이의 셋째아들로 1390년(庚午 공양왕2년)에 서원별서(瑞原別墅 파주농장)에서 탄생하셨고, 일찍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군자감(軍資監)의 직장이 되셨다. 어버이가 모두 돌아가시자 더이상 벼슬길에 나가기를 구하지 않고 말씀하기를, “지난 난(亂)에 몸을 굽혀 벼슬하였던 것은 바로 부모님을 영화(榮華)롭게 봉양(奉養)하기 위함이었으나, 지금은 무엇 하러 그것을 하겠느냐? 또한 우리 가문은 세업(世業)이 유과(儒科)이고 일세(一世)에 밝게 빛났는데 어찌 ‘서리를 밟으면 단단하게 얼음이 언다.’는 경계(警戒)가 없을소냐”라고 하시고는 오직 경적(經籍)만을 즐기고 연구하며 거문고와 술잔을 즐거움으로 삼으시다가 수(壽)를 다하셨다.
장지(葬地)는 경기도 수원에 있다고 전하나, 여러 번 난(亂)을 거치면서 실전(失傳)하였다. 조선 영조 을유(乙酉 1765)년에 함안군 산인면 입곡리 안현록(鞍峴麓)에 설단입비(設壇立碑)하니 공(公)의 장자(長子)인 창공(昌恭)의 묘역(墓域)이다. 단향기(壇享記)는 一山 趙昺奎가 撰하였고 현재의 제단비(祭壇碑)는 2002년에 창원 퇴촌 거주 후손 종태(鍾泰 26세)의 헌성금으로 세워졌다. 매년 10월 상순(上旬)에 세사(歲祀)를 모신다.
배(配)는 안인(安人) 하음봉씨(河陰奉氏)로 부(父)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유검(由儉)이고 증조부는 금자광록대부 벽상삼중대광 도첨의정승과 하음부원군으로 봉해지신 문겸공(文謙公 天祐)이다. 묘소는 실전되어 직장공의 단소(壇所)에 부향(祔享)하였다.
슬하에 아들만 셋이니 곧 창공(昌恭 校尉公)ㆍ창렴(昌廉 감찰공)ㆍ창직(昌直 부솔공)이다. 교위공의 후손은 경남 창원(마산)ㆍ김해ㆍ함안 지역에 주로 살고, 감찰공의 후손은 함안 서촌과 경기도 여주 ? 양평 그리고 강원도 홍천에 많이 살고, 부솔공의 후손은 강원도 춘천ㆍ양구 그리고 경기도 광주ㆍ양평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