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조는 10세 리(理)로서 4세인 문성공(文成公 諱 珦)의 6대손이며, 판서공(判書公 諱 從約)의 4남이다. 조선 태조 2년(1393)에 출생하셨고 호가 서파(西坡)이다.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후에 예천군수를 지냈으나 단종이 손위되자 곧 벼슬을 버리고 순흥 대룡산에 들어가 두문독서하면서 자손들에게 벼슬하지 말 것을 유명(遺命)하였다 한다.
서파공파(西坡公派)의 역사
1) 서파공파의 유래
공은 판서공 종약(從約)의 4남으로 조선 태조 계유년 서기1393년에 태어나셨고 호가 서파(西坡)이고, 또 호는 낙원(樂園)인데 계파(系派)는 경상도 순흥부(順興府)에서 나왔다.
공은 외모가 준수하고 또 도량이 넓었으며 문장과 학업을 가정에서 배웠으므로 당대의 명유들이 공을 추존하여 높였다. 백형(伯兄)과 중형(仲兄) 두분이 이상(貳相)과 판윤(判尹)으로 모두 현달하고 중용 되었으나, 공은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옛 사람들은 지위가 높은 분들이 많은 것을 경계하였다. 우리 집안에는 회헌선조 이후로 고려와 조선에서 드러났으며 지금 형제들과 자질(子姪) 들이 부원(府院)과 대각(臺閣)의 관직에 가득하고, 집안에 있는 모든 일가들이 한사람도 벼슬하지 않는자가 없으니 ,이는 바로 지위가 성만(盛滿)한 때이다.
공은 문을 닫고 책을 읽으며 깊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일삼았다. 경태 계유년에 나라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후 외직(外職)으로 의령(宜寧)현감에 부임 하였는데, 흉년을 만나 고을 백성들이 흩어져 도망하자, 공은 봉급을 내어 구휼해 주고 은혜와 신의로 어루만지니 흩어져 도망한자들이 사방에서 돌아왔다. 도백(道伯)은 치적(治績)이 훌륭하다고 하여 그 내용을 장계로 조정에 올렸으므로 다음해인 갑술년(1454)에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승진하였다.
공은 억지로 부임 하였는데 얼마 안 있다가 단종(端宗)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자리를 물려주자, 공은 은둔할 것을 결심하고 관향(貫鄕)으로 돌아와 거주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벼슬을 버리고 순흥부(順興府)의 남쪽 삼십리쯤 되는 누암산(樓巖山) 아래에 집터를 정하고는 누(樓)자를 용(龍)자로 고쳐 용암산(龍巖山)이라 이름 하였다. 그리고는 황무지를 개척하여 촌락을 이루고는 마을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하였으며 인하여 낙원옹(樂園翁)이라 호 하였으니 대룡산은 제갈공명의 와룡(臥龍)의 뜻을 따른 것이요, 사마온공(司馬溫公)의 독락원(獨樂園)의 뜻을 따른 것이다.
경태(景泰) 정축년(1457)에 사육신(死六臣)의 화가 일어나자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순흥부사(順興府使)인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상왕(上王)인 단종(端宗)을 복위(復位)하려고 도모하다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관복을 입은 집안들이 모두 멸족(滅族)을 당하니 당시 죽계(竹溪)의 물이 붉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공은 돈독한 뜻으로 굳게 은둔하여 산수의 사이에서 한가롭게 노닐며 일생을 마쳤다. 일찌기 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지금은 벼슬할 만한 때가 아니다. 물은 가득차면 넘치고 달은 가득차면 기우는 법이다. 우리 종족은 번성하고 또 현달함이 지금보다 더 한 적이 없었으니 너희들은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여가에 주자(朱子)의 글을 읽어 선조께서 회암(晦菴)을 사모한 뜻을 살피고, 녹(祿)을 구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말라. 비록 서울에 가더라도 공경히 선조의 사당에 배알할 뿐이요, 부디 가까운 친척과 부귀 영달하는 일에 언급하지 말라. 만일 나의 그 교훈을 어긴다면 이는 진실로 너의 애비가 바라는 뜻이 아니다.
말년에는 말 한 필과 종 한 명을 데리고는 폐지된 순흥부의 숙수사와 평리의 유지에 가서 놀곤 하였는데 숙수사는 바로 선조께서 독서하던 절이었고 유지에는 선조께서 벼루를 씻은 연못이 있었다. 공은 매양 감탄하고 배회하면서 항시 시를 읊었다 . 그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竹水淵源泗水湄 죽수의 연원은 사수가에서 근원 하였으니
讀書吾祖長於斯 우리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독서하며 이곳에서 자라셨네
徘徊感慕油然意 배회함에 감모하는 마음 유연히 일어나니
月照庭梧洗硯池 달은 뜰아래 오동나무 세연지에 비추누나
일시에 유명한 공경들이 편지를 보내왔으나 공은 답하지 않았으며, 방백 수령들이 매양 와서 방문하였으나 공은 모두 만나보지 않았다. 서울에 거주하는 조카와 손자들로서 대신의 반열에 있는 자들이 공이 시골에서 담박하게 사시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매양 사시(四時)에 아름다운 음식을 갖다 드리면 공은 이를 물리치고 웃으며 말씀하기를 “소백산의 머위 나물이 내 분수에 족하니 관청의 고량진미가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공이 별세한 후 몇 년이 못되어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서울에 있던 여러 집안과 대종가가 모두 화를 면치 못하였으나 공의 집안만은 다행히 화를 면하니 당시 사람들은 공의 선경지명에 탄복하였으며 현재까지도 관향지의 영주에 많은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관향지의 유적지 보존관리와 시향을 준비한다.
배위는 숙인(淑人) 경주이씨(慶州李氏)이며 슬하에 백문(伯文) 숙문(叔文) 계문(季文) 흥문(興文) 익문(益文)의 5형제를 두었는데 장남과 차남은 후손이 없고 3형제분만 후손이 있으며 묘소는 순흥 대룡산 계곡(大龍山 桂谷)에 자좌(子坐)이고 세사(歲祀)는 음력 10월 초 6일에 봉행(奉行)하고, 또 죽림사(竹林祠) 향사(享祠)를 삼월(三月) 구월(九月) 중정일(中丁日)에 봉행(奉行)하고 있다. 대룡산에 종택과 서파정(西坡亭)이 있다.
2) 서파공파의 분파도
서파공파의 상대(上代)
(1) 안리(安理)
공의 이름은 휘 리(理), 호는 서파(西坡)이다. 공은 문성공(文成公) 회헌부자(晦軒夫子)가 6대조이다. 5대조는 휘 우기(于器)니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지고 문순공(文順公) 시호를 받았으며 호가 죽옥(竹屋)이다. 고조는 휘 목(牧)이니 순흥군에 봉해지고 문숙공(文淑公) 시호를 받았으며 호가 겸재(謙齋)이다. 증조는 휘 원숭(元崇)이니 순성군(順城君)에 봉해지고 문혜공(文惠公) 시호를 받았다. 조부는 휘 원(瑗)이니 벼슬이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지냈는데 공민왕 임신년에 정사를 말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외지로 유배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했고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아버지는 휘 종약(從約)이니 해주목사를 지냈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이 모두 두문지(杜門誌)에 기재되어 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니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양도공(良度公) 양생(良生)의 따님이다.
공은 태조 2년 1393년에 서원(瑞原)의 옛 집에서 출생했는데 풍채가 훌륭하고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문장과 학업을 가정에서 얻었지마는 한 시대의 명사(名士)들이 추중하여 숭앙하였다. 백씨와 중씨 두 형이 이상(貳相)과 판윤(判尹)에 올랐는데, 공은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즐기지 않고 문을 닫고 독서하면서 심오한 깊은 도리를 더듬고 깊은 학문을 쌓아가는 것에 힘썼다. 그러다가 외직인 의령 현감에 부임하여 흉년이 들자 사비로 백성을 구휼하였고, 예천군수로 부임하여 임하다가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하자 관직을 그만두고, 대룡산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1456 병자(丙子)년 정축년에 사육신(死六臣)의 참화가 일어나, 금성대군이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1467 정축년에 금성대군과 순흥부사이던 이보흠(李甫欽)이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함께 처형을 당하였고, 순흥부 내의 관복을 입은 70여 가문이 일시에 전멸을 당했는데 이러한 때를 당하여 선생께서는 문을막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스스로 깊이 몸을 숨겼다.
명공과 거경(巨卿)들이 서신을 많이 보냈지만 답서를 하지 않았고 방백과 수령들이 항상 찾아 왔으나 만나주지 않았으며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영월을 우러러 바라보며 항상 스스로 슬피 상심하면서 만년을 보내었다. 일찍이 말 한필과 동자 하나를 데리고 폐부(廢府)가 된 순흥의 숙수사(宿水寺)를 왕래했는데 평리(坪里)에 이르면 회헌 선생이 독서하던 옛 터로서 세연지(洗硯池)가 있는데 거기를 지날 때마다 감모(感慕)의 시를 읊는 것을 예사로 했다. 그 시에 이르기를,
죽계수(竹溪水)의 연원 사수(泗水)의 물가에는 우리 조상님 독서하면서 여기서 자라나셨네 이리저리 거닐어 보니 감모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데, 달은 뜰의 오동과 세연지를 비추네
하였다.
항상 물과 달은 가득하면 넘치고 줄어든다는 경계로서, 자손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고 명하고 조석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여가에는 주자서(朱子書)를 읽게 하였음은 선조께서 주자를 존모하시던 뜻을 체득케 함이었으며, 절대로 영달(榮達)의 길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공이 별세한 후 서너 세대 만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서울에 있던 여러 종족과 대종가가 모두 참혹한 화를 당했으나 오직 선생의 집만 홀로 화를 면했으니 그 시대 사람들이 앞일을 아는 안식에 감복했으며 그 사실이 『장릉지(莊陵誌)』에 기재되어 있다.
묘소는 순흥부의 남쪽 대룡산의 계곡(桂谷)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있으며, 순조 임오년에 사림들의 공의로서 용연사(龍淵祠)에 제향토록 했으며 배위는 숙인(淑人)인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니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진 종직의 따님이며,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진 지수(之秀)의 5세 손녀이다. 묘는 선생의 묘 뒤에 부장(?/葬)했다.
아들 5형제를 길렀는데 백문(伯文)과 숙문(叔文)은 모두 후사가 없고, 계문(季文)은 음사로 부사직을 지냈고 병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흥문(興文)은 좌랑(佐郞) 벼슬을 했고, 익문(益文)은 사과(司果) 벼슬을 했다.
판서인 계문에는 3남이 있으니 영(瑛)은 명경진사(明經進士)로서 호가 오지당(五之堂)이다. 정(玎)은 충순위(忠順衛) 벼슬이었고 다음은 류(瑠)이다. 좌랑인 흥문은 2남이 있으니 희(熙)는 별좌였고 다음은 도(燾)였으며, 사과인 익문도 2남이 있으니 휴(烋)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학행이 있었으며 다음 신(信)은 판관이었다.
(2) 안계문(安季文)
공은 바로 단종조(端宗朝)의 명신(名臣)인 예천군사(醴泉郡事) 서파공(西坡公) 휘 리(理)의 셋째 아드님이다. 어머니는 숙인(淑人) 경주이씨(慶州李氏)로 군수(郡守) 이종직(李從直)의 따님이며, 월성군(月城君) 지수(之秀)의 현손이다.
공은 총명하고 영특하며 단정하고 후중하였으며, 효성스럽고 우애하며 강직하고 청렴하였다. 엄친(嚴親)의 교훈을 받들어 경전(經傳)과 사책(史冊)을 널리 섭렵하여 일찍이 학업을 이루었는데, 특히 주자(朱子)의 책을 읽기 좋아하며 말씀하기를 “이는 바로 회헌선자(晦軒先子)께서 연경(燕京)에 가시어 손수 기록해서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신 것으로 성문(聖門)의 적통(嫡統)이다.” 하였다. 녹(祿)을 구하고 명예를 얻는 소소한 일에는 전혀 뜻이 없었으며, 매양 아름다운 숲과 맑은 물에서 놀며, 하루 종일 피로함을 잊고 유유자적하였다.
군사공(郡事公)은 단종(端宗)이 선양(禪讓)하는 것을 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대룡산(大龍山)에 은둔하였으니, 용산(龍山)은 순흥부 소속이며 순흥은 바로 공의 관향이다. 군사공은 마침내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고 경서(經書)를 탐구하며 뜻을 높이고, 자손들에게 벼슬길에 나서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공은 이때 처음 벼슬에 올라 사직(司直)이 되었으나 부친의 뜻을 받들어 사임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오직 거문고와 서책에 취미를 붙였다. 사우(士友)들은 효성과 학행을 소중히 여겨 지금 4백여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끊임없이 공을 흠앙하고 칭송해 오고 있다.
부인 김씨(金氏)는 관향이 연안(延安)으로 벼슬이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나복산인(蘿?/山人) 김도(金濤)의 후손인데, 공의 증직(贈職)에 맞추어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인 영(瑛)은 진사(進士)로 독실한 행실이 있었으며, 차남인 정(玎)은 충순위(忠順衛)이고, 셋째는 유(瑠)이다.
(3) 안흥문(安興文)
공의 휘는 흥문(興文)이며, 조부 종약(從約)은 이조판서, 부친 리(理)의 호는 서파(西坡)로 예천군사(醴泉郡事)로 단종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순흥부(順興府)의 남쪽 대룡산(大龍山)에 은거하였다. 모친은 숙인(淑人) 경주이씨 계천군(鷄川君) 종직(從直)의 따님으로 5남을 두었다. 공은 넷째 아들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남다르게 빼어나고 기국이 원대하며 연원이 분명하고 학문이 깊어 집을 벗어나지 않아도 이미 궤범(軌範)을 이루어 근본에 돈독하였다.
효도와 우애가 지극히 순수하여 어버이를 모실 때 뜻과 몸을 모두 봉양하였다. 벼슬은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이르러 직분에 힘을 다하였다. 공(公)은 앞을 내다보는 감식이 있어 벼슬에 나아가기를 좋아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독서하였는데 여러 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견지하고 나아가지 않기는 하였지만 처음부터 세상을 잊으려는 뜻은 없었다. 만년에 군현(郡縣)의 벼슬에 올랐으며, 별세 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고, 묘는 계곡(桂谷) 선영아래 자좌(子坐)의 언덕에 있다. 부인은 용인이씨로 증정부인(贈貞夫人)이 되었으며, 1남 희(熙) 별좌(別坐)를 두었다. 장손은 무과에 급제하여 양주(楊州) 해등촌(海等村)에 옮겨 살았다. 증손 의순(義純)은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折衷)을 지냈고 현손 연옥(連玉)은 증판결사(贈判決事), 연후(連後), 연운(連雲)은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4) 안익문(安益文)
공은 예천군수를 지낸 서파공(西坡公) 휘 리(理)의 다섯째 아드님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숙인(淑人)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군수(郡守) 이종직(李從直)의 따님이며 월성군(月城君) 지수(之秀)의 현손이다.
공의 자는 자회(自悔)이며 1456(甲子)년에 대룡산에서 태어나시어, 을해년(1505)에 卒하였다.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 계곡에 단소(壇所)가 있다. 배위는 의인청송 심씨(靑松沈氏)이며, 부(父)는 복태(復泰)이다. 공께서는 효심이 지극하고 학문에 독실했고, 형제간에 우의가 있었다. 자(子)는 휴(烋)와 신(信)을 두었다.
(5) 안영(安瑛)
공의 휘는 영(瑛), 자는 자온(子溫)이고, 호는 오지당(五之堂)이다.
조(祖)의 휘는 이(理)이니 호는 낙원(樂園)이며 벼슬에 나가기를 즐기지 않아서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다가 외직으로 의녕(宜寧)고을의 수령(守令)이 되었을 때에 경상감사(慶尙監司)가 치적(治績)이 훌륭하다가 조정(朝廷)에 찬양(讚揚)의 글을 올려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승진되었는데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게 양위(讓位)했다는 말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순흥부(順興府)의 남쪽 대룡산(大龍山)에 살 곳을 정하여 살았으며 스스로 호를 서파(西坡)라고 한 뜻은 아마도 옛날 은(殷)나라 충신(忠臣)이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저 서산(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캤다는 뜻을 취한 것이리라.
부친의 휘는 계문(季文)이니 벼슬은 선교랑(宣敎郞)의 품계(品階)로 용양위부사직(龍?5衛副司直)이었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에 증직(贈職)된 연안김씨(延安金氏)이니 벼슬이 의빈부(儀賓府)의 경력(經歷)인 광이(光?의 따님이며 호(號)가 나복산인(蘿?5山人)인 도(濤)의 6대손이다.
세조(世祖) 8년인 계미년(1463)에 선생이 출생(出生)하시고 33세 때인 을유년에 성균진사시(成均進士試)에 합격하시니 명성(名聲)이 세상(世上)에 알려져서 장차 높은 관직(官職)을 두루 지낼 수 있었으나 가정(家庭)의 가르침을 잘 계승하여 관작(官爵)과 국록(國祿)에 마음 쓰지 않고 경전(經傳)의 뜻에 대한 학문(學問)을 궁구(窮究)하며 중용(中庸)에 있는 박학지(博學之), 심문지(審問之), 신사지(愼思之), 명변지(明辨之), 독행지(篤行之)의 다섯 지(之) 자를 취하여 ‘오지당(五之堂)’이라고 편액(扁額)하고 날마다 일상생활에 보고 살피는 바탕이 되게 했다. 후진들을 가르쳐서 많은 인재를 교화했으니, 덕행과 문장이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중종(中宗) 20년인 을유년(1525)에 천수(天壽)를 다하시니 향년(享年)이 63세였다. 대룡산(大龍山)의 동쪽으로 이정표 하나 사이인 옥적봉(玉笛峯)아래에 있는 선영(先塋)의 왼쪽 정남향(正南向)의 둔덕에 장사(葬事) 지냈고 배위(配位)는 의인(宜人)인 문의박씨(文義朴氏)이니, 진사(進士)인 경원(慶元)의 따님인데 생년(生年)과 졸년(卒年)은 고증(考證)할 수 없고 묘(墓)는 선생의 묘 계하(階下)의 같은 좌향(坐向)에 있다.
공께서는 6남을 낳았으니, 공택(公擇)은 동학교관(東學敎官)이었고, 공우(公佑)는 충순위(忠順衛)였으며, 공필(公弼)은 생원(生員)이었고, 공신(公信)은 호가 매담(梅潭)이니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형조정랑(刑曹正郞)과 이조정랑(吏曹正郞)과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을 지냈으며, 면천군수(沔川郡守)를 배명(拜命)받았을 때인 명종(明宗) 11년 병진년(1556)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 겸(兼) 경연춘추관(經筵春秋館)의 기주관(記注官)에 선임(選任)되었으며, 청풍군수(淸風郡守)에 보직(補職)되었다. 공건(公健)은 벼슬이 부장(部將)이며 다음 공직(公直)이다.
(6) 안공필(安公弼)
공의 휘는 공필(公弼), 자는 충지(忠之)이다.
조 휘 계문(季文)은 부사직(副司直)이고, 부친 휘 영(瑛)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이고, 어머니는 문의박씨(文義朴氏)로 진사 경원(慶元)의 따님이다. 공께서는 6남매 중에서 셋째로 태어나셨다.
가정(嘉靖) 경자년(庚子年)에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셨는데, 모재(慕齋) 김선생(金先生)이 시험을 주관하여 장원에 뽑혔다. 몇 달이 안 되어 관학(館學)이 공을 추대하여 성균관 장의(成均館掌議)로 삼았으나, 공은 벼슬길에 나설 뜻이 없었으므로 머무르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임인년(壬寅年)에 신재(愼齋) 주선생(周先生)이 백운동(白雲洞)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창건하였는데, 그 계획과 경영에 있어서 공과 공의 백형(伯兄) 교관공(敎官公)과 중형(仲兄) 죽남공(竹南公)이 실제로 참여하여 상의하여 확정하였다.
만년에 두문불출하시면서 뜻을 구하고 경전(經典)을 가지고 생활을 즐기셨고, 도의(道義)의 낙이 날로 깊어질수록 외면의 물질은 더욱 가볍게 여겼다. 이전에 서파공(西坡公)께서 가문이 지나치게 번성하고 가득 찬 것에 대하여 경계하시어 후손들이 평안한 삶을 누릴 계책으로 삼으셨는데, 과연 신사년에 사화27가 일어나서 죄망(罪網)이 하늘에 가득하였고 종친들로서 모면한 이가 적었다. 그러나 공은 서파공의 훈계를 잘 지켜서 천수(天壽)를 누리셨다. 가정 신해년(辛亥年) 3월 초3일에 별세하셨다. 묘소는 계곡(桂谷) 서파공 묘소가 있는 산 오른쪽 서록(西麓) 자좌(子坐)에 비갈(碑碣)이 있다.
배위(配位)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진사 석전(碩銓)의 따님으로서, 봉정대부(奉正大夫)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영양(英陽) 남정중(南鼎重)의 외손이시다.
공의 묘소 뒤에 있다.
공께서는 아들 넷을 두셨으니, 박(璞)과 근(瑾)과 참봉(參奉)인 진(?과 부장(部將)인 선(璇)이다.
(7) 안공신(安公信)
서파공이 휘 계문(季文)을 낳았으니 부사직(副司直)이고, 휘 계문이 휘 영(瑛)을 낳았으니 성균진사(成均進士)에 호가 오지당(五之堂)이다. 어머니는 문의박씨(文義朴氏)로 진사 경원(慶元)의 따님이다. 이분이 휘 공신(公信)을 낳았으니 바로매담선생(梅潭先生)이다.
공의 자는 대부(大孚)이고, 호는 매담(梅潭)으로 홍치(弘治) 병진년(1496) 10월 9일에 탄생하셨으며 명종(明宗) 신유년(1561)년 5월 3일에 돌아가셨다. 장지(葬地)는 순흥(順興)의 용산(龍山) 계곡(桂谷)에 있으며 자좌(子坐)이다. 배위(配位)는 상산박씨(商山朴氏) 참봉(參奉) 귀수(龜壽)의 따님과 순천김씨(順天金氏) 군수(郡守)인 순개(舜凱)의 따님과 남양홍씨(南陽洪氏) 판서(判書) 희(熙)의 따님이다.
아들 숙(璹)은 이조참의동추(吏曹參議同樞)이니 홍씨(洪氏) 소생이고, 박씨(朴氏)는 딸 하나를 낳아 참봉(參奉) 이시우(李時雨)에게 출가하였고, 김씨(金氏)는 딸이 셋이니 교리(校理) 양사준(楊士俊)과 현감(縣監) 김자해(金自海)와 참봉(參奉) 이섬(李暹)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가정(嘉靖) 무자년(1528)에 생원이 되었고, 정유년(153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과 형조정랑(刑曹正郞)의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을 지냈다. 이어서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역임하다가 은계승(銀溪丞)으로 전임하였다. 병진년(1556)년에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제수받았다. 육순이 넘어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역임하다가 은퇴하였다.
선생은 천성이 자애(慈愛)롭고 용모가 풍위(豊偉)하였으며 부모님을 효양(孝養)하고 처사(處事)에 신의(信義)를 다하며, 고향 용산(龍山) 오동정(梧桐亭) 곁에 정자를 지어 ‘우우정(友于亭)’이란 편액을 걸고 5형제가 한 책상을 쓰니 옛날 춘진(椿津)의 풍모였으며, 성품(性品)이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 구진(求進)에는 뜻이없었다.
공께서는 일찍이 퇴계(退溪)선생과 금계황공(錦溪黃公)과 주신재(周愼齋)선생과 서로 친교가 두터웠다. 수창한 시문(詩文)과 문장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오직 시고문집 1책만 남아 있다. 매담선생에 관한 기록은 『관동록(關東錄)』과 『흥주읍지(興州邑誌)』 및 주신재 선생이 쓴 『죽계지(竹溪誌)』 등에 남아 있다.
서파공파의 빛난 후손들
(1) 안박(安璞)
공의 휘는 박(璞)이요. 자는 백헌(伯獻)이다. 고조의 휘는 리(理)요, 호는 서파(西坡)이니 단종이 양위(讓位)하던 때에 예천군사(醴泉郡事)벼슬을 버리고 관향(貫鄕)인 순흥부(順興府)의 대룡산(大龍山)에 사셨기 때문에 자손들이 거기에 세거(世居)하며 성만지계(盛滿之戒)를 남겨서 후손(後孫)을 보전(保全)했다. 증조의 휘는 계문(季文)이니 음사(蔭仕)로 부사직(副司直)이오,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추증되셨다. 조의 휘는 영(瑛)이니 호는 오지당(五之堂)이며 성균진사셨다. 부친의 휘는 공필(公弼)이니 성균생원이요. 모친은 의인(宜人)인 안동권씨이니 진사의 석전(碩銓)의 따님이다.
공께서는 명종 20년 병진(丙辰 :서기1566년)에 출생하여 장년(長年)에 벼슬길에 올라,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으나, 고조이신 서파공께서 남긴 유훈(遺訓)에 따라 관직을 버리고 낙향(落鄕)했으며, 음사(蔭仕)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다. 인조 9년 신미(서기 1631년)에 65세로 돌아가시었으며, 배위(配位)는 상주김씨(尙州金氏)인 성관(聖寬)의 따님이시다. 공께서는 아드님 경철(敬哲)과 경일(敬一) 두 분을 두시었다.
(2) 안선(安璇)
공의 휘는 선(璇), 자는 계헌(季獻), 호는 서오(西塢)이다. 조부의 휘는 영(瑛)이니 진사(進士)이고 호가 오지당(五之堂)이다. 부친의 휘는 공필(公弼)이니 생원(生員)이고 호가 죽오(竹塢)이다. 어머니 의인(宜人)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진사(進士) 석전(碩銓)의 따님이시다.
공께서는 너르기[廣川]의 집에서 출생하셨고 텃골[基洞] 서향(西向)의 언덕에 장례되었다. 배위(配位) 숙인(淑人) 안동권씨(安東權氏)는 감(?의 따님이다. 1남 경립(敬立)은 판관(判官)을 지냈다.
공께서는 어릴 때부터 학문(學問)에 독실(篤實)했고 은거(隱居)하면서 품행(品行)이 방정(方正)하셨다. 박 소고(朴嘯皐)승임(承任) 선생, 이 성오당(李省吾堂) 개립(介立) 선생과 서로 종유(從遊)하셨다. 공의 아름다운 행적(行蹟)이 종택(宗宅)에 남아 있었으나 화재(火災)를 당하여 소실되어 아무 곳에도 증거를 찾을수 없으니 애석한 일이다.
(3) 안숙(安璹)
공의 휘는 숙(璹), 자는 군옥(君玉), 호는 오암(梧巖)이다.
조부(祖父)이 휘는 영(瑛)인데 호(號)는 오지당(五之堂)이며 성균진사(成均進士)인데 학행(學行)이 있으시며 부친의 휘는 공신(公信)인데 호(號)는 매담(梅潭)이며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덕행(德行)과 풍절(風節)이 세인(世人)의 중망(重望)을 받았다. 모친인 숙인 상산박씨(商山朴氏)인데 참봉(參奉)인 귀수(龜壽)의 따님이며 숙인순천김씨(淑人順天金氏)인데 군수(郡守)인 순개(舜凱)의 따님이며 숙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판서(判書)인 희(熙)의 따님이시다.
공은 명종 경술년(1550) 6월 3일에 용산(龍山) 옛 집에서 나셨으니 홍씨(洪氏)의 소생(所生)이다. 천품(天稟)이 수이(秀異)하여 효우(孝友)가 겸전(兼全)하고 경사(經史)를 넓게 해득하며 무공랑참봉(務功郞?/奉)으로 이조참의(吏曹?/議)에 승진하셨다. 부모에게 효도 못한 한 일 벼슬살이 하느라 봉양(奉養)을 못하여 종신토록 한(恨)이 되어 선친(先親)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온갖 정성과 예의를 다하고 친척에 화목하고 불쌍한 자 도왔으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선조의 정자(亭子)를 청소하여 경전(經傳)을 연구(硏究)하고 후세(後世)를 가르치며 항상 회헌선조(晦軒先祖)께 국자감(國子監)을 유생(儒生)들에게 보낸 충효성경(忠孝誠敬)의 글을 읽으시며 공자(孔子)의 도(道)를 배우고자 하면 먼저 주자학(朱子學)을 배워야 한다면서 주자서(朱子書)를 강(講)하며, 경(敬)과 의(義)를 중히 여겨 근본을 세우고 몸소 실천하도록 하였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오르셨다.
광해군 경신년(1630) 9월 3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71세이다. 장례는 계곡고조후(桂谷考兆後)에 자좌원(子坐原)이다. 배위(配位)는 정부인 진성이씨(貞夫人眞城李氏)인데 도화서별좌(圖畵署別坐)인 환(土奐)의 따님이시다.
공은 6남을 낳으셨는데 경복(景福)의 호는 근신재(謹?/齋)인데 충순위(忠順衛)이며 효우학행(孝友學行)으로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황금계문집(黃錦溪文集)에 등재되어 있다. 경록(景祿)의 호는 풍월정(風月亭)인데 안골포만호(安骨浦萬戶)이며, 경호(景祜)의 호는 송국재(松菊齋)인데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이시다.
경례(景禮)는 선전관(宣傳官)이며, 경유(景?는 전라첨사(全羅僉使)였다.
(4) 안결(安?)
공의 휘는 결(?이요, 자는 가패(可佩)이니 회헌대조(晦軒大祖)의 10대손이요, 서파공(西坡公)의 4세손이다. 조부의 휘는 정(玎)이니 벼슬은 예조참의(禮曹?/議)였고 아버지의 휘는 공보(公輔)이니 벼슬은 부장(部將)이시었다.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인 참봉 준(俊)의 따님이며 벼슬이 부사직(副司直)인 형(珩)의 손녀이시다.
공은 신묘년 출생하여 훌륭한 재주가 일찍이 나타나서 20세에 진사가 되고 22세에 문과급제에 발탁(拔擢)되었으며 27세에 중시(重試)에도 합격하여 좋은 벼슬을 두루 지내다가 외직으로 보임되어 단양군수(丹陽郡守)가 되었을 때에 본심을 잃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궁핍한 백성을 구제함에 특별 했으며 더욱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교육함에 뜻을 두어서 군수(郡守)로 8년 간 있을 때에 치민(治民)과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저서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군수(郡守)를 칭송했었다.
조선 선조(宣祖) 27년 갑오년(1654) 10월 10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4세였으며, 배위(配位)인 숙인박씨(淑人朴氏)도 부장(?5葬)했다. 박씨(朴氏)는 본관이 범산(泛山)이며 참판(?5判) 언광(彦光)의 따님이다.
공께서는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 대업(大業)은 시정(寺正)이고 대수(大遂)는 판관(判官)이고 대덕(大德)은 도정(都正)이다. 딸은 병판(兵判) 이준(李濬)과 생원(生員) 장응식(張應拭)에게 출가했다.
(5) 안욱(安頊)
공의 휘는 욱(頊), 자는 근재(謹哉), 호는 만지정(萬枝亭)이다.
조부의 휘는 거(?이니 첨지(僉知)를 지냈으며 아버지의 휘는 응일(應一)이니 공조참의(工曹?/議)에 증직(贈職)되었으며 효행(孝行)이 있었다. 어머니는 수안김씨(遂安金氏)이니 생원(生員)인 윤찬(允燦)의 따님으로서 선조 14년 신사년에 공(公)을 낳았는데 두 살 때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나 점점 자라서 배움에 힘쓰고 문장(文章) 짓은 것을 일삼아서 계축년(癸丑年)에 향시(鄕試)에서 으뜸으로 합격하고 사마시에도 합격했다.
임술년에 아버지 상(喪)을 당했고 계유년에 명경과(明經科)에 뽑혀서 곧 전적벼슬이 제수되었으며, 을해년과 신사년에는 거듭 상원현(祥原縣 :지금의 평안남도 中和郡)과 흥양현(興陽縣 :지금의 全羅南道 高興郡)의 현감에 제수되었다가 병으로 고향에 돌아와서 6, 7년 간 누웠다가 기축년 9월에 집에서 졸(卒)하였다. 부인(夫人) 유씨(柳氏)는 예조참의(禮曹?5議)에 증직(贈職)된 종개(宗介)의 따님인데 풍산(豊山)의 대성(大姓)이다.
공은 아들 다섯을 두셨으니, 세성(世成)과 세형(世亨)과 세영(世英)과 세행(世行)과 세종(世從)이시다.
(6) 안세승(安世承)
공의 휘는 세승(世承), 자는 천보(天輔), 호는 동계(東溪)이다.
조부의 휘(諱)는 경국(敬國)이니 벼슬이 주부(主簿)였고, 아버지의 휘는 로(?)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品階)로 벼슬은 사복사정(司僕寺正)이시었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달성서씨(達城徐氏)로 아버지는 극(克)이시다.
공(公)이 광해 6년 갑인년(1614) 9월 9일에 출생하여 숙종 6년 기미년(1679)년 9월 5일에 졸하니 향년이 66세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에 증직(贈職)된 창원황씨(昌原黃氏)이시다. 공이 두아들을 거느리고 순흥(順興)으로부터 예천(醴泉)에 이거(移居)하였기 때문에 자손(子孫)이 예천에 살았다.
아들 만장(晩璋)은 통훈대부(通訓大夫)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증직되었다.
공은 대현(大賢)과 고관(高官)이 대대로 이어지는 가문(家門)에서 출생하여 천성(天性)으로 타고난 성품이 위엄이 있고 강직하여 사람들이 공경하며 두려워하는 바이었지만 일찍이 고향으로 옮겨 와서 예천(醴泉)의 산수풍경(山水風景)을 즐기면서 풍월(風月)을 읊으며 고상(高尙)한 취미 속에서 기쁜 마음으로 지냈으며 후학(後學)들을 학문(學問)으로 나아가게 권장하고 후손(後孫)을 선도(善導)하는데 힘썼으며 덕(德)이 몸을 윤택하게 함에 부합(符合)하고 훌륭한 행의(行義)는 향중(鄕中)에 드러났었다.
(7) 안응복(安應福)
공의 휘는 응복(應福)이요, 자는 수오(受五)이며 호는내광(內光)이다. 서파공 휘 리(理)의 오대손이시다. 일찍이 공의 부친 휘 방(邦)께서 관향지인 순흥에 사시다가 선조 30년(서기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경주 북면 기계촌(杞溪村)으로 피난하셨다. 삼년 후인 경자년(庚子年) 서기 1600년에 공께서 그곳에서 출생하셨다. 인조 15년 서기 1637년 공의 부친이 별세하시자, 기계촌(杞溪村) 유좌(酉坐)에 안장하고 당시 혈전(血戰)이던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종군(從軍)하시어 공을 세우셨다. 그 후 효종 원년 서기1650년에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승차(陞差)되어 울산남창(蔚山南倉)으로 부임하시면서 가족을 이곳 서포(西浦)로 이주케 하셨다.
공은 벼슬을 그만두신 후에도 여생을 여기서 보내시다가, 현종 10년 1669년 향년70세로 별세하시었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경주 김씨요, 빙부(聘父)는 상주(尙周)이시다.
공은 슬하(膝下)에 오형제를 두셨는데, 성립(成立), 성남(成男), 성민(成敏), 성회(成會), 성생(成生)이시다. 이들 후예들이 현재 울산, 경주, 양산, 동래,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그 수는 천여 명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