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추공파(僉樞公派)

파조는 9세 종의(從義)로서 4세인 문성공(文成公 諱 珦)의 5대손이며, 경질공(諱 瑗)의 3남이다. 성균 생원이며 벼슬은 첨지중추부사(정3품 당상관)를 지내셨다.

 

후손들 가운데는 왕조실록에 자주 나오는 공조참의 요경(堯卿), 임란과 병자호란 때에 공을 세운 분이 많다.

 

mark.gif첨추공파(僉樞公派)의 역사

 

1. 첨추공파의 유래

첨추공께서는 1362년 고려 공민왕(恭愍王) 11년 임인년에 문성공(文成公)의 현손(玄孫) 경질공(景質公) 원(瑗)의 아들 육(六)형제(兄弟) 중 삼남(三男)으로 출생(出生)한 종의(從義)이시다.

 

공(公)께서는 일찍이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으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歷任)하던 중, 1392년 임신(壬申)년 31세시에 이태조(李太祖)가 조선(朝鮮)을 개국하자 사직하시고 부친(父親) 경질공(景質公)이 유배(流配)되자 유배지(流配地)로 수행하고 후(後)에 귀가되자 아버지 따라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하셨다. 노년기(老年期)에는 경기도 파주(坡州)의 서쪽 교외에 농가(農家)를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평생(平生)동안 충절(忠節)을 지키며 살았다고 한다.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봉직(奉職)되었고,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의성 김씨(義城金氏) 사정(司正) 김영우(金瑛遇)의 따님과 후배(後配) 강진 강씨(康津康氏) 이다.

 

묘(墓)는 경기도 장단군 눌목리(訥木里) 구정동 문성공(文成公) 묘의 중려해좌(中麗亥坐)에 있고 묘비도 있다고 한다.

 

배 두 분의 묘(墓)는 무표(無表)이시다. 묘가 휴전선 이북에 있어 성묘(省墓)가 불가하자, 1973년 경기도 시흥시 월곶동(月串洞) 산(山) 117번지에 단비(檀碑)를 설치하여, 매년 음력 10월 6일에 시사(時祀)를 뫼시고 있다.

 

공께서는 슬하에 2남1녀를 두셨는데, 장남 영(永)은 음성현감(陰城縣監)을 지내셨다. 차남) 우(遇)도 현감(縣監)을 지내셨고, 여식은 유원문과 혼인하였다. 장남영(永)은 2남3녀를 두었다. 장남 요경(堯卿)(1440-1518년) 공조참의(工曹參議), 차남 운경(雲卿)(1443-1521년)은 진사(進士)를 지냈고, 장녀 봉예(奉禮)는 권문(權門)에, 차녀는 신문(申門)에, 삼녀는 홍문(洪門)에 출가(出家)하였다. 공(公)의 차남 우(遇)는 2남1녀를 두셨는데, 장남 승조(承祖), 차남 승복을 두고, 따님은 김문(金門)에 출가하였다.

 

국가에서 기록하는 것은 역사라 말하고 사가에서 가족을 기록하는 것을 족보라하는데 모두 여러 가지 판별되어 근본을 돈독히 하고 끝까지 갖추어 하기를 나무가 뿌리를 북돋아 주어야 가지가 번성하는 것 같이 하고 물의 근원이 멀고, 여러 갈래가 나누어져 있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이것으로써 종통을 존중하고 이것으로써 인륜을 돈독하게 하면 공훈과 덕업과 작록이 이루어져 어질고 불초한 일가에 문신과 무신을 기록하는 것이 국가에 어진역사와 무엇이 어찌 다르리오. 우리 순흥 안씨 족보는 옛날 가정 병오년(丙午年)(1659)에 이르러 문간공 안현께서 처음 편찬하시였으며, 효종 기해(己亥)(1659)에 순원군 응창공께서 이어서 발간했고 영조 을유(乙酉)년(1765) 족보를 간행하고 정조 정사(丁巳)년(1797)에 족보를 또 하고 순종 경인(庚寅)(1830) 족보를 해서 전후다섯 차례 한 것이 모두 대종중 합보를 했다.

 

계묘(癸卯)년 봄에 대종중 회의에서 발의하여 족보를 증수키로 하였는데, 그일이 모두 거창하고 역사가 번잡하여 마침내 그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순흥과 남원의 두 파가 아울러 파 족보를 하였다.

 

공(公)의 후손(後孫)들은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 관항리, 보통리 수원시, 시흥시 월곶동, 용인, 강원도 인제, 충북 음성, 충남 부여, 예산, 경북 김천 어모면 구례리, 경남 함안, 창원, 마산, 부산, 전남 광주, 무안군 일원 등 전국 각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시조의 12세에서 28세까지 살아오다가 산업사회로 발전함에 따라 전국의대도시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다.

 

후손(後孫)들은 이조(李朝)에서 대사간(大司諫)등 당상관(當相官) 20여명을 배출하고, 이조정랑(吏曹正郞) 등 50여명을 배출하여, 국가(國家)의 사회(社會)에 봉사(奉仕)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현재 전국에 거주하는 후손(後孫)들은 1980년 대보(大譜)에 의하면 현재(2012초) 약(約) 15,000명으로 예상되고, 각 종친은 국가사회발전과 국리(國利) 민복(民福)을 위하여 각 분야에서 조상(祖上)의 뜻에 거슬림이 없이 활동하고 있다.

 

2. 첨추공파 세파의 입향 경위 및 현황

첨추공파 파조는 휘 종의(從義)로, 휘 원(源 8세(世), 경질공)의 아들 6형제중, 3째 아들로 1362년에 태어나셨다. 공의 조부는 광정재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을 지냈으며, 순성군에 봉해진 문세공 휘 원숭(元崇)이시다. 공은 일찍 성균관(成均館)에 등과하였으며, 성균관 생원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副事)를 지내셨다. 1392(임신년[壬申年]) 4월에 조선이 개국하자, 경질공을 모시고 유배(流配)가는 곳으로 따라 갔으며, 뒤에 또 다시 경질공을 모시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만년에는 파주의 서쪽 고와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우국충절을 지켰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의성(義城 김씨(金氏)이며 사정(司正) 김한우의 따님이시다. 후배(後配)는 숙부인(淑夫人) 강진 강씨(康津 康氏)이시다. 슬하엔 2남 1녀로 의성현감(義城縣監)을 지낸 영(永), 현감 우(遇)와 딸을 두셨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늘목리 구정도 문성공 회헌선조 묘(墓) 아래 해좌(亥坐)이다. 세사(歲祀)는 음력 10월 2일이지만, 이북 땅에 묘소가 있으므로 향사를 올리지 못하고, 현재 경기도 시흥시 월곶동에서 단을 모시고 음력 10월 6일 후손이 세사를 하고 있다.

 

3. 지파세파의 입향 경위 및 현황

(1) 첨추공파(僉樞公派) 종가(宗家) 김천(金泉) 이주한 경위

시조공의 16대손이고, 첨추공(僉樞公)의 7대손(七代孫) 종손인 계승(啓丞)이 출생한 환경은, 조부 진(璡)은 무과(武科) 선전재(宣傳宰)로 흥덕, 거제 영득에 순회 근무하고, 사헌부감찰 훈련판관 후 여주목사로 재직하시었으며, 부친 철남(哲男)공은 통덕랑(通德郞)이시었다.

 

공(公)께서는 1568년 한양에서 출생하여 수학중(修學中), 9세에 부(父)와 사별하고, 10세 때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13세 때에 모친 숙부인(淑夫人) 전주 이씨(全州 李氏)와도 사별하였다. 18세 때에 조부가 54세로 타계(他界)하자 학업(學業)을 포기하고 생업이 바닥나 몹시 곤궁(困窮)하여 살아갈 수 없자, 마침내 광주(廣州)고을 후방리(後方理)로 이사하였다가 1년을 살아보고, 다시 충북(忠北)의 영동군 황간(黃澗) 도산동(都山洞)으로 임시 거처를 옮겼으며, 2년 만에 다시 금산(金山:현재 김천(金泉)의 왕대촌)으로 가서 정착하여 자손(子孫)이 내려졌다. 이곳에서 4대(四代)를 살면서 자손(子孫)이 독자(獨子)로 이어 오던 중, 20세 봉흥조시(鳳興祖時)에 11살이던 시절 집에 오신 스님이 이곳 지리(地理)에는 안(安)씨가 손(孫)이 귀하니, 자기 절(寺)이 있는 재 넘어 절에서 수학하면서 몇 년 봉사하면 장래가 밝아진다는 스님의 말을 믿고, 12세시에 출가(出家)하여 스님을 따라 경북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能治里)에 있는 사찰(현재 불타고 없음)에서 봉사하며 수학하다, 능치에 사는 경주 최씨(慶州 崔氏)부인을 맞아드려, 그곳에서 10리 떨어진 어모면 구례리 당시 이현리(二峴里)에 정착하여 5형제를 얻어 자손이 번창하게 되었다.

 

(2) 김천(金泉)에서의 순흥안씨

김천 대향면에서 4대, 어모면 구례리에서 10대를, 집성촌을 이루어 300여 명 150가구가 되었고 관계(官界), 교육계에 지출한 10여명은 교장 중앙부서의 국장급 인물을 배출하였다. 1970년대 이후 전국으로 도시로 진출 고향에는 100여 명만 거주중이나, 전국적으로 500~600명으로 추정하며 친목을 도모하며 살아가고 있다. 현재 공무원으로는 사법연수원 20기 안상돈 서울북부지검 검사장으로 근무하며 법질서 확립을 위해 노력하다 퇴임하였다. 

 

(3) 안공 휘 선(璿)선조 시흥시 월곶동에 입향하신 경위

시조공의 14세(十四世) 휘 선(璿) 선조께서 경기도 시흥시 월곶동에 입향(入鄕) 정착하시어 후손들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번성하시었다.

 

휘 선(璿) 입향조(入鄕祖)께서는 인손(仁孫) 선조의 4남(四男) 2녀(二女) 중 4남(四男)으로, 1556년 정월 6일 탄생하시여 소년기를 경기도 고양군 양주군 지역에서 성장하시고 학문을 열심히 하여 무과(武科)에 합격하시어 함경도 영흥판관(永興判官)을 역임하셨다. 결혼은 안산(安山) 대월면(大月面: 현재 경기도 시흥시 월곶동)에 거주 하시는 안동 김씨(安東 金氏) 15세손이신 경상도 언양 현감(縣監)을 지내신 계복(繼福)의 자(子) 언충(彦忠, 1534년: 갑오년 생)의 사위가 되시어, 안산(安山) 대월면(현 시흥시 월곶동)에 정착하시게 되었다.

 

휘 선(璿) 할아버지께서 40대에 정착(定着)하시었다면, 약 450여 년 전(前)이 되는데, 후손(後孫)이 현재 월곶 지역뿐 아니라 서울, 수도권 등 전국 각 지역에 사는 후손이 근 800여 명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감개 무량한 일이다.

 

현재 후손 중에는 박사학위를 획득한 과학도가 있고, 기업체를 경영하며, 해외에 수출하여 국가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가 하면, 중고등학교의 교장, 교감 또는 각 軍(군)의 장교 등 다 방면에서 국가 발전에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쁜 일이다.

 

 ? 첨추공 묘소는 현재 휴전선 이북, 장단군 동오리 대덕산 즉 문성공 조하구정리(兆下口井里) 동구내(洞口內) 중 해좌(亥坐)에 계시므로, 시제(時祭)를 올릴 수 없어, 시흥시 월곳동 첨추공파(僉樞公派) 달월종중(達月宗中)에서 안타깝게 여겨오다 어려운 결단을 하여 단비(壇碑)를 건립하여, 음력 10월 6일로 시제사를 첨추공파조 뿐아니라, 국가의 요청에 의해 묘소를 파주, 양주지역에서 이장(移葬)하여, 10세 영(永), 11세 요경(堯卿), 12세 순(珣), 15세 영남(穎男) 등 여러 선조님의 시제사를 받들고 있다.

 

(4) 휘 상룡(尙龍) 선조 진주시 금곡면에 입향하신 경위

시조공으로부터 16세손 휘 상용(尙龍) 선조께서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에 입향(入鄕) 정착하시어, 후손들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번성하시었다.

 

16세손 휘 상용(尙龍) 선조께서는, 부친 휘 철남(哲男)의 2남이시고, 진주판관(晉州判官)을 역임하셨다. 공께서는 경남 진주(晉州)에서 진주판관(晉州判官)을 훌륭히 역임하시고, 현지에 영주하시게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은 진주시, 삼천포, 함안, 부산 등 경남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에 약 600여 명이 산재하여 우리나라 교육계, 국가기관, 각 군, 대기업 등 각 분야에서 맡은 일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5) 안 휘 억국(億國) 선조 전남 무안 일로면에 입향하신 경위

시조공으로부터 15세손 휘 억국(億國, 1543~1592년) 선조께서는 장흥(長興)지역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시고 선조(宣祖) 임오년에 무과(武科)에 합격(1585년)에 하셨다. 그 후, 훈련주부부정(訓練主簿副正)으로 승진하여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장군의 호위장으로 근무중, 1592년 임진(壬辰)년 전남 무안 당포해전(塘浦海戰)에서 전사(戰死)하여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애도해 하였으며, 무안군 일로면(一老面) 망해산(望海山) 자좌(子坐)에 안장하여 모셨다.

 

이로부터 후손(後孫)들이 전남지역 광주, 무안, 목포 및 전국에 300여 명이 분산되어 국가에 여러 방면으로 기여하며 살고 있다. 시 제사는 과거에는 음력 10월에 지내다가 최근에는 따뜻한 봄날을 매년 정해서 지낸다.

 

(6) 안 휘 성휴(性休) 선조 화성시 정남면에 입향하신 경위

시조공으로부터 20세손 휘 성휴(性休) 선조의 자(子) 장손(長孫) 광진(光進)과 경휴(敬休) 자(子) 사촌(四寸) 광택(光宅) 조(祖)와 같이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으로 광진 관항리, 광택 보통리로 낙향하여 현재 약 150여 명이 각지에서 살고 있다. 또한 이조 철종(哲宗) 고종(高宗) 이후 다수의 인재들이 화성, 수원, 용인, 대구, 충청 등 도처에 살고 있다.

 

시제사(時祭祀)는 매년(每年) 10월 셋째 일요일(日曜日) 모신다.

 

4. 첨추공파의 빛난 후손들

(1) 첨추공파의 인물 약사(略史)

첨추공은 고려 문성공 안향(安珦)의 5대손으로, 아버지 결질공 원(瑗)과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에 셋째아들로 고려 공민왕 초에 태어나, 이름은 종의(從義)요, 조선조 태종조에 성균관 생원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순흥 안씨 첨추공파조이시다.

 

공의 아들형제 영(永)과 우(遇)로 하여금 후손이 전국에 많이(약 육만) 퍼져 각계 각층에서 생활하고 있다. 조선조에서 큰손자 휘 요경(堯卿)은 공조참의로, 증손 휘 순(珣)은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하시었다. 손자 휘 경(璥)께서 귀(貴)하게 되시어 증 가선대부요, 현손 인손(仁孫)은 도호부사로 여주 목사를 거쳐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또 현손 의손(義孫)은 무과로 부령부사로 남해에서 임진유공 순절하시어 원종공신 증 병조판서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시었다. 5대손 휘 요경의 아드님 휘 진(璡)은 무과로 선전관을 거쳐 사헌부감찰 혀주목사 임진원종신으로 증 자헌 병조판서에 추증되시었다. 그의 아우 휘 선(璿)은 무과로 영흥판관 장악원정을 하셨다. 현손에 의손(義孫)은 무과로 부령부사 임진유공 순절하여 증 병조판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시었다. 의손(義孫)의 장자 휘 경(璥)이 문과로 대사관이 되고 문장이 당세에 추종을 불허했다. 휘 영(潁)의 아우 휘 륵(?은 강계부사로 원종공신 병조판서를 하시고, 아우 휘 려는 운산군수요, 아우 휘 관(瓘)은 무과로 호위대장이 되시었다. 휘 륵(?의 아들 휘 만성(晩成)은 무과로 수부장 여절교위로 가선동추하시고, 휘 진(璡)의 차자 휘 영남(潁男)은 무과로 경기수군절도사 정주목사를 거쳐 병자호란시 남한산성에서 순절하여 정조 갑자에 충산정여를 하사받았다.

 

5대손(代孫) 휘 사후(士後)의 아들 휘 억국(億國)은, 무과로 훈련원 주부부정을 거쳐 임진왜란 이순신장군의 진에서 수문장으로 충무공을 호종하여 공을 세웠다.

 

영남(潁男)의 아들 휘 근(根)은 무과로 창성부사하고 병조참판 지의금부사를 하시었다. 근(根)의 둘째아들 휘 세욱(世煜)은 무과로 가의대부 경기수군절도사 영종 첨절제사를 하시었다. 윤(潤)의 철휴(喆休)공은 돈녕부 도정으로 가선대부 대부협판이 되시었다. 재(載)의 아들 휘 두령(斗齡)은 무과로 영흥부사(永興府使) 수군절도사를 거쳐 사헌부 장령을 하시었다.

 

광택(光宅)의 아들 휘 창빈(昌彬)은 동지충추부사를 하시였으며, 계창(啓昌)의 아들 휘 전유(田有)는 규장각 부제학이 되시었다. 평(枰)의 아들 휘 희묵(羲?은 성균관생으로 가선동지중추부사를 하시었으며, 정환(正煥)의 아들 휘 치원(致元)은 문과로 주서(注書)를 하시었다. 휘 치원(致元)의 아들 휘 필호(弼濩)는 고종 황제시 문과로 출사하여 종사랑을 거쳐 통정대부 봉상시 부제조를 하시고 승정원 승지로 퇴직하시어 문중사 승조목족의 성의를 가지고 종영(鍾永) 씨와 더불어 무오보를 편수하시고 발문을 쓰시었다.

 

(2) 안필호(安弼濩)

공의 휘는 필호(弼濩)요, 자는 상락이요 호는 죽헌이시다. 공의 증조는 휘 의묵(義?이요 통정도정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요, 조부는 휘 정환(正煥)으로 의금부도사요, 아버지는 휘 치원(致元)으로 고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주서를 하였다. 어머니는 숙부인 한양 조씨 재구의 따님으로, 안씨 문중에 들어와 부인으로서 미덕을 갖추셨다. 공께서는 1남 2녀를 낳으시니, 아드님 휘 필호(弼濩) 공은 고종 5년 무진(서기 1868년 7월 6일생)년에 태어나시었다. 성장하면서 면암 최익현 선생 문하에서 부지런히 공부하여 계사년 문과에 급제하시여 벼슬길에 나가니, 종사랑하고 경자년에 시서랑이 되고 전보하여 홍문관 시독을 하고, 고종 임금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하실 때에 공이 왕을 모시고 호종하시다가 환궁하시었다. 임자년 통정대부 비서승에 오르시고 겸해서 장예원 장예(掌禮)를 하시고, 을사년에 봉상사 부제조(副提調)하고 승정원 승지에 오르시었다.

 

당시 국제정세는 약화되어 서양 못된 풍속이 들어오고 청나라 세력 러시아세력 일본세력 갈등 속에, 공의 배일사상(排日思想)이 강하다 하여 조정에서 쫓겨나 충청북도 보은군에 자취를 감추고 있으셨다. 6년 후에 고종황제께서 하사한 땅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 관향리에 돌아와, 사패지는 화성군 정남면 관향리 일대가 전부이고 인근면 일부가 다 도지 밭고 관리하다가 해방되고, 국가 시책에 의하여 토지 분배가 되었다. 그때에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정남면장으로 추대되어 업무 진행 중에 일본인 경찰(순사) 주재소장을 쳐 죽였다.

 

공께서는 우선 우국지책(憂國之策)으로, 문맹퇴치를 기본으로 삼고 강당을 설치하였으며, 선생을 채용하여 이 고장 청소년을 모집 무료교육을 계속하였다. 종중에서 무오보를 1918년에 간행하였는데, 동참 주관하여 발문도 쓰시었다.

 

공께서는 기미년(1919년) 3월 만세시 향남면 제암리 만세사건을 배후에서 조정지휘하다, 광복 후 건국사업에 선구적 역할로 이웃에 무슨 일이든지 돕지 않음이 없었다. 또한 좋은 법도로 가정도 잘 다스리고 우애로우니 향당이 다 우러러 보았다.

 

광복 이후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하여 좌우 갈등 속에서도 조금도 흉사가 없었다. 1954년 갑오 12월 4일에 사망하시니 향년이 87이시었다. 묘소는 화성군 정남면 관항리 담안에 있다. 배위는 기계유씨 진호(鎭浩)의 따님이시고, 고종 정묘년 1867년 6월 17일에 출생하시었으며, 1943년 계미 정월 14일 돌아가시었다. 묘소는 정남면 관항리 담안 상봉산에 있다. 후배는 숙부인 나주 라씨이시니, 1885 고종 을유 7월 20일생이시다. 두 아들을 낳으시니 병성(柄星), 병욱(柄旭)이라. 1922년 임술 3월 19일 졸하시니, 묘소는 정남면 오일리 산록에 있다. 삼배(三配)는 숙부인 장흥 마씨 행중의 따님으로, 1890년 고종경인 11월 12일 생이시고 1남 1녀를 낳으셨으며, 아들은 병두(柄斗)요 딸은 풍천 임원빈에게 출가하였다. 1912년 임자 6월 20일졸하시었으며, 묘소는 정남면 보통리 장대 산봉산 경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