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고려 말기의 어지러운 시국에 태어난 문교진흥과 주자학의 보급에 헌신하던 안향은 충렬왕 32년(1306)에 별세하니 그때에 그의 나이 64세였다. 조정에서는 그가 죽자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를 장단부 송림현 대덕산(長湍府 松林縣 大德山)에 장사지냈다.
그는 충숙왕 6년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그리고 순흥(順興)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제향되고 있다. 특히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중종(中宗) 38년(1543)에 세워진 것으로, 이는 당시의 선비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안향의 고향인 죽계(竹溪) 백운동에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모방하여 창건하고 여기에 문성공 안향의 유상(遺像)을 안치했던 것이다. 그리고 학전(學田)을 두고 또 도서를 비장하여 후학의 수학을 편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흠모는 한편으로 안향이 최초의 주자학자였다는 데에서 비롯되지만, 실제로 말년에 안향은 주자의 화상을 걸어놓고 제사하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고려사』에 전하는 것을 보면 그는 특히 6경과 논어를 연구하기에 힘썼다 한다. 그의 학문적 깊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아무튼 그는 학문의 대가라기보다는 조선 500년의 학풍을 잇게 하는 동방 성리학의 조종으로서, 특히 고려인들보다는 조선인들에 의하여 추앙을 받았던 것이다.
고려의 정치이념은 불교적인 색채와 풍수설에 입각하여 유교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무신란과 몽고의 간섭으로 고려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모순과 혼란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으며, 이를 타파하고자 공민왕은 신진세력인 유학자들을 우대하였던 것이나, 그 결과는 고려사회의 기본적인 모순을 더욱 드러나게 함으로써 파멸을 초래하였다. 안향은 명운이 다한 고려를 교학의 힘으로 건지는 데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며, 오히려 새로운 국가건설의 명분을 필요로 하는 신진 사대부들을 위한 교두보로서 그 공적이 두드러진다. 이와같이 안향으로부터 유입․연원되는 송학, 즉 성리학은 고려말에 이르러 이제현․정몽주․이색․이숭인․길재와 같은 명유(名儒)들을 낳았으며, 또는 정도전, 김숙자 등에게 전해짐으로써 조선 건국의 이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일 조선사회의 중추적 지도층 세력인 사대부(士大夫: 양반)계급을 형성시키는 기본적인 원리가 되었다 할 것이다.
안향은 가장 험난한 고려의 풍운 속에서 태어나 후학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보다도 조선에 의하여 더욱 존중받기에 이르렀으니, 그는 그의 생존 당시의 업적보다는 사후의 평가와 명망이 더욱 드높게 된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즉, 안향은 중세 말기에 태어나 근세사회를 여는 가장 중요한 학문적 전환을 이룩하게 한 사람이니, 역사 발전에 기여한 그의 이와 같은 역할은 새로운 각도에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안향의 연보]
1243 고려 고종30 순흥면 석교리에서 아버지 부(孚)와 어머니 강주우씨 사이에서 출생
1260 원종1(18세)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의 벼슬을 받았다가 곧 직한림원으로 전보
1263 원종4(21세)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왜구를 금할 것을 청함
1265 원종6(23세) 아들 우기(于器)가 출생함, 개성으로 이사
1270 원종11(28세) 안향 삼별초 난을 당해 구금되었다가 탈출함
1271 원종12()29세) 서도에 명을 받고 다시 내시원에 명을 받음. 몽고 국호를 원이라 함
1272 원종13(30세) 감찰어사로 자리를 옮김,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김
1275 충렬왕1(33세) 상주판관으로 전보. 관제를 고침
1277 충렬왕31(35세) 판도사좌랑이 됨. 원 미얀마 정벌
1278 충렬왕4(36세) 감찰시어사로 옮김 국자사업으로 승진 제학궁시 지음
1282 충렬왕8(40세) 안우기(子) 진사합격
1283 충렬왕14(46세) 우사의대부를 거쳐 얼마 후에 좌부승지로 옮김. 좌승지로서 동지공거가 되어 윤선좌 등 33인을 과거로 취함
1289 충렬왕15(47세) 유학제거가 됨.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감.
1290 충렬왕16(48세) 원나라 연경에서 주자서를 손으로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서 돌아옴. 부지밀직사사가 됨. 고려 국왕 강화도로 몽진
1292 충렬왕18(50세) 강화에서 개경(개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김.
1294 충렬왕20(52세) 안향이 동남도병마사를 제수받음. 원 세조 죽음. 합포에 출진, 다시 지공거가 되어 윤안비 외 33인을 과거에서 선발함.
1295 충렬왕21(53세) 밀직사사로 승진
1296 충렬왕22(54세) 삼사좌사로 자리를 옮김, 충렬왕이 공주와 함께 원나라에 들어감
1297 충렬왕23(55세) 첨의참리세자이보가 됨. 정사의 집뒤에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모심
1298 충렬왕24(56세)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이 됨.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l감수국사가 됨. 충선왕을 따라 원에 들어감
1299 충렬왕25(57세) 다시 수국사가 됨
1300 충렬왕26(58세) 광정대부찬성사에 오름. 얼마후 벽상삼한삼중대광이 됨.
1301 충렬왕27(59세) 저택을 조정에 헌납하여 빈궁 신축에 사용. 서부 낭온동으로 이사함
1303 충렬왕29(61세) 인재양성을 위한 양현고 재원을 위해 백관에게 은포를 갹출토록 함.
1304 충렬왕30(62세) 섬학전을 둠. 문묘대성전을 신축
1306 충렬왕32(64세) 서거. “문성” 시호 내림. 장단부 송림현 대덕산에 장사지냄.
1318 충숙왕5, 문묘에 영정봉안, 상향에 치제
1319 충숙왕6, 문묘에 종사
1542 조선 중종37, 순흥에 백운동서원 설립
1549 명종4, 사액으로 소수서원 건립
1634 인조12, 송경에 유기비(遺基碑) 건립
1639 인조17, 신도비를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