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서 당대의 모든 학자들에게 유종(儒宗)으로 존숭을 받았고, 이러한 과정에서 성리학은 고려․조선사회의 새로운 사상적 이념으로 정착 되어갈 수 있는 기반으로 조성되어갔다.
1) 생애(生涯) |
안향(1243~1306)은 무인집권기인 고종 30년에 출생하여 충렬왕32년까지 활동한 분으로서 당시 정치 사회에 이념적 좌표를 제시한 정치가이며 학자이다. 그는 유교적 통치이념을 정치신조로 정치개혁의 선봉에 섰고, 충렬왕 15년(1289)에는 원에서 성리학을 수용하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에 전하였다. 이로써 그는 무인집권기를 거치는 동안 사상적 이념을 잃고 공동화되었던 당시 사회에 성리학을 전수함으로써 우리 사상계에 새로운 좌표를 제시하게 된다. 이러한 안향의 노력으로 당시 고려사회는 새로운 사상적 좌표를 구하게 되고, 이후 성리학은 고려․조선사회의 정치․사회․사상의 이념적 기조로 정착되어 갔다.
조선의 건국은 바로 성리학을 이념적 기조로 하여 성립되었음을 감안할 때 그가 전래한 성리학의 영향이 어떠했던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가 사상사적인 측면과 교육사적인 측면에서 또 하나 주요한 의의를 갖는 것은 충렬왕 27년(1301)을 전후하여 행한 교육활동이다.
당시 고려사회는 무인집권기와 몽고의 침입, 삼별초의 난, 일본정벌 등 다난한 정치적 소용돌이가 연속되면서 교육은 거의 황폐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당시 사회에서 그는 당면과제로 교육의 부흥에 있음을 설득하여 국학을 중건하고 기금을 마련하는 등 교육중흥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로써 교육은 중흥되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학자들이 대거 배출되면서 고려후기의 학풍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게 된다. 이러한 그의 공로는 사후 문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입게 되고, 조선시대에는 그를 배향하는 서원이 설립됨으로써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를 이루게 된다.
안향은 충렬왕 대를 전후하여 활동한 대학자로 호는 회헌, 본관은 순흥이다. 무인집권기인 고종 30년(1243) 경상도 순흥부 평리촌에서 출생하여 충렬왕 32년(1306)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처음에는 이름을 유(裕)라 하였으나 후에 향(珦)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 문종의 휘가 향(珦)이므로 어휘를 피해서 문묘위판을 비롯한 각종 의례에 처음 이름인 유로 환원하여 배향토록 하니, 이로써 조선시대에는 유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증조부는 흥위위(興威衛)의 보승별장을 지내고 신호위(神虎衛) 상호군으로 추봉된 자미(子美)이며, 할아버지는 추밀원부사로 추봉된 영유(永儒)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를 지내고 태사문하시중으로 추봉된 부(孚)이다.
『회헌선생실기』와 『순흥안씨족보』에는 그의 증조부인 자미를 시조로 하고, 그이상의 선대는 보이지 않는다. 자미가 역임한 최종 관직이 흥위위 보승별장이라는 무관의 관직임을 볼 때, 그는 무인집권기인 명종 말년이나 신종 때에 무예로 입신한 것이 분명하다.
안향의 할아버지인 영유는 관직이 없었고, 아버지인 부는 『회원선생실기』에 고종 7년(1220)에 출생하여 25세인 고종 31년(1244)의 갑진문과에 급제하여 관로에 나가 밀직부사․정의대부․판도판서를 최종관직으로 하여 치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열전에는 그의 출신에 대해, 안향은 초명은 유(裕)요, 아버지는 부로서 본주리(本州吏)이며, 의업으로 출신하여 관이 밀직부사에 이르러 치사하였다. 라고 하였고, 『해동명신록』에도 “공의 처음 이름은 유인데 향으로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문종의 휘와 같아 이를 피하여야 할 바 되어 옛 이름으로 환원하였다. 흥주인(興州人)이다. 아버지 부(孚)는 본주(本州)의 리(吏)로 업의(業醫)로 출신하여 관이 밀직부사에 이르렀다.3
안향은 어릴 때부터 행동이 장중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으며, 또 학문을 좋아하였다. 과거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순흥부 북쪽에 있는 숙수사에 왕래하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가 태어난 곳의 근처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가 이곳에서 항상 벼루를 씻었다 하여 사람들은 이곳은 세연지라 이름 하였다.
아들 우기가 태어난 원종 6년(1265)에는 그가 출생한 순흥부를 떠나 서울로 본제를 옮겼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자 교서랑(校書郞)을 배수하였고, 곧 직한림(直翰林)으로 옮겨 문한(文翰)을 담당하게 된다.
원종 11년(1270)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난의 주동자들이 안향을 회유하고 그들에게 협조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도리어 의로서 그들을 설득하였고, 얼마 후 탈출하여 왕에게 귀환하였다. 당시 그의 좌주(座主)인 유경도 그들에게 협조할 것을 강요당하였으나 탈출하고 있다.
원종 12년(1271)에는 서도(西道)에 봉사하였으나 곧 내시원으로 소환되었고, 다음해에는 감찰어사에 승보하였다. 충렬왕 원년(1275)에 는 상주판관으로 출보하였다가 3년 후에는 그 동안의 치적이 청렴하였다는 포상을 받아 판도사좌랑을 배수하였고, 이어 감찰시어사로 옮겼다가 곧 국자사업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그는 우사의를 거쳐 충렬왕 14년(1288)에는 좌부승지를 배수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윤선좌(尹宣佐)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이 해를 전후하여 본국유학제거(本國儒學提擧)를 임용받았다. 충렬왕 15년(1289) 11월에는 왕이 공주와 세자를 대동하고 원으로 갔는데 이때 그도 왕을 배행하였다.
이것이 그가 연경(燕京)에 간 첫 번째 사행인데, 그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원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비로소 성리학을 접하게 된다. 그가 성리학을 수용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가 된다. 충렬왕 16년(1290) 3월에 충렬왕의 귀국과 더불어 귀환하여 곧 부밀직사사를 배수하였다. 그는 그동안의 관로생활을 통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고, 특히 원(元)나라에 가는 왕을 호종하는 과정에서 두터운 신뢰를 얻게 된다.
이것은 이후 나라의 중대가 있을 때는 항상 그에게서 자문을 구하였고, 또 왕이나 왕비가 질병에 걸렸을 때는 그의 집으로 몸을 옮겨 피방(避方)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충렬왕 20년(1294) 4월에는 동지밀직사사로서 동남도병마사가 되어 합포에 출진하였고, 이해 7월에는 지공거가 되어 윤안비 등 33명을 선발하였으며, 이해 12월에는 지밀직사사로 승보하였다. 다음해 정월에는 밀직사사가 되고 충렬왕 22년(1296) 2월에는 삼사좌사가 되었으며, 다음 해 12월에는 첨의참리(僉議叅理)와 세자이보(世子貳保)를 배수하였다.
『회헌선생실기』를 보면 이 해에 그는 거재(居齋) 후편에 정사를 신축하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봉안하여 경모하였고, 호를 회헌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충렬왕 24년(1298)에 충선왕이 즉위하여 첨지기무․행동경유수․집현전태학사․계림부윤을 배수하였고, 같은 해 7월에는 다시 첨의참리가 되었다. 다음 달에 충렬왕이 복위하였고 충선왕은 원에 행차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충선왕을 호종하여 다시 원에 가게 된다. 충렬왕 26년(1300) 8월에 광정대부․찬성사를 배수하였으나 당시 반대파들의 모함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도첨의중찬의 직을 받고 현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 찬성사로 복귀하였다.
충렬왕 30년(1304) 관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계속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2년 후인 충렬왕 32년(1306) 9월에 죽으니, 그의 나이 64세였다. 충렬왕은 그의 부음을 듣고 장단(長湍)에 있는 대덕산을 장지로 하사하고 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장례를 행할 때 칠관십이도(七管十二徒)의 제생(諸生)들이 모두 소복을 입고 길에서 제사를 올렸으니 당시 그가 행한 교육활동이 어떠했던가를 보여준다. 충숙왕 5년(1318) 2월에 그의 영정을 문묘에 모셨고, 다음해 6월에는 그의 문생인 신천(辛蕆 등의 건의를 수용하여 문묘에 배향하였다.
2) 성리학(性理學)의 전래(傳來) |
한국사상사와 교육사에 안향의 업적으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그에 의한 성리학 전래이다. 충렬왕 15년에 왕을 호종하여 연경에 가서 원의 학자들과 교유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을 접하게 된다. 그는 성리(性理)의 서(書)를 보고 이를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묘사하여
다음해 3월 귀국할 때 가져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전래된 시초이다.
당시 상황에 대하여 『회헌선생실기』는 “연경에 머물면서 주자의 서를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묘사하였다. 때에 주자의 서는 당시 우리나라에 행해지지 않고 있었는데 선생께서 처음으로 이를 보고는 공문의 정맥임을 알고 크게 기뻐하여 그 책을 수록하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모사하여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 주자의 서가 강구되었다.” 라고 하여 안향이 성리학을 전래하게 되는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 「안자연보」별본에서도 위의 내용과 거의 비슷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열전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위의 사실을 누락시키고 단지 “만년에는 항상 회암선생(주자)의 진을 걸어두고 경모하였고, 마침내 호를 회헌이라 하였다. 매양 선비로서 가히 배울만한 자를 만나면 이를 권하였다.” 고 하여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다.
안향의 성장배경은 그로 하여금 원에 대한 배타적 의식을 갖게 하였고 이것은 이후 그의 관로생활이나 대원의식에 있어서 일관된 이념적 기조가 되고 있다. 또 그의 증조부 자미는 무인출신으로 흥위위의 보승별장이었다. 따라서 그는 무인적 기질도 아울러 갖고 있어 행동이 장중하였고, 정사에 임해서는 소신을 갖고 과감하게 처리하였다. 특히 그의 학문적 소양은 춘추대의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정치이념으로 하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이념과 행동은 원종 11년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들의 회유를 받았지만 이들은 의로써 설득하고 탈출하고 있는 것에서 보이고 있다.
또 원종 12년에는 서도에 봉사하여 공정무사하게 일을 처리하여 조정으로부터 청렴하다는 칭찬을 받았고, 이어 내시원으로 소환되어서는 규율을 잡고 관기를 확립하였다.
충렬왕 원년(1275)에는 상주판관으로 출보하였는데, 3년 동안의 치정에서 정사가 청렴하여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게 된다. 그가 상주판관으로 재임 증에 무녀들의 농간을 퇴치한 것은 당시 정치의 귀감이 되기도 한다. 『고려사』 열전에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안향이) 상주판관이 되니, 때에 무녀 3인이 요사한 신을 받들고 뭇사람들을 유혹하여 협주로부터 시작하여 각 군현을 돌아다니면서 이르는 곳마다 사람의 소리를 지어 공중에서 불러 은은하게 꾸짓는 것같이 하니, 듣는 사람들이 달려가 앞을 다투어 제사를 차려 감히 지체하지 못하였고, 각 군의 수령이라 할지라도 또한 그러하였다. 그 무녀가 상주에 이르자 향은 이들을 잡아 곤장을 쳐서 칼을 씌우니, 무녀가 신의 말을 칭탁하면서 화복으로 겁을 주었다. 이에 상주인들이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향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며칠 후에 그 무녀가 애걸함으로 풀어주었더니, 그 뒤에는 요사스러움이 마침내 없어졌다.
이러한 그의 강직한 성격은 충렬왕 14년(1288) 9월 동지공거가 되어 인재를 선발할 때도 보인다. 안향은 원의 지배하에 있는 당시의 정치상을 개탄하였다. 그의 국가관은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적 국가관이었다. 이러한 그의 국가관은 충렬왕 15년 왕을 호종하여 원에 갈 때 만리장성을 지나면서 지은 시에서 보인다.
흰 성벽은 종횡으로 만리를 뻗었으니
백성들은 이를 믿고 편안한 생을 누렸구나
당시 진시황의 죄를 따진다면
분서갱유가 죄일 뿐, 성 쌓은 일은 아니로다.
위에서 안향의 정치관을 읽을 수 있다. 진시황의 죄를 묻는다면 분서갱유에 있는 것이지, 만리장성을 쌓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바로 정치이념이기도 하다. 그는 위의 시에서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아 백성들을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였던 것을 칭찬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사회가 국방력의 약화로 원에 복속되고 있었던 당시 정치상을 개탄한 것이기도 하다. 또 그는 진시황의 죄를 분서갱유에 있다고 하여 진시황이 유교적 정치이념을 구현하지 못한 것을 비난하고 있다.
이 시에서 안향이 지향하는 정치관이 무엇이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안향은 원의 조정에 출입하면서 조금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임하고 있다.
충렬왕 24년 5월에 왕이 보위를 충선왕에게 전위하였으나 이해 8월에는 충렬왕이 다시 복위하고 충선왕은 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안향이 수행하게 된다. 연경에서 왕을 대신하여 원제의 질문에 응하게 되는데 이때 원제에 대한 안향의 태도는 참으로 의젓하다. 『고려사』열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원제(원 세조)가 왕(충선왕)을 급히 부르니 왕이 두려워하였는데 승상이 나와서 말하기를 “수석대신인 자가 입대하라.”고 하였다. 안향이 들어가니, 승상이 전지하기를 “너의 왕은 어찌하여 공주에게 가까이 하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향이 이르기를 “내전의 일은 외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지금 이것을 물으신다면 어찌 물음에 답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승상이 이 말을 제(帝)에게 그대로 말하니, 제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가히 대체(大體)를 아는 자라 할 수 있다. 어찌 원인(遠人)이라고 해서 경멸히 대할 것인가.”라고 하고는 다시는 이 일을 묻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의식은 충렬왕 15년 왕을 호종하여 원에 갔을 때 지은 『만리장성』이란 시에서도 보이고, 또 원제의 질문에 대한 그 대답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의식은 원에 체류하는 동안 성리학을 접하게 되자 이에 심취하여 경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안향이 성리학을 수용하였다는 사실은 충렬왕 24년 원에서 지은 시에서도 보인다. 이때 그는 충선왕의 원행(元行)을 호종하여 원에 머물고 있었다.
기린같은 공자께서 백호구로 단장하고
패옥과 산호로 치장하고 녹로검을 허리에 찼구나
상국의 풍속을 보니 계찰이 생각나고
도산의 옥폐백은 부루에게 부끄럽다.
막막한 관하에 걸친 구름에 마음 태우고
무성한 옛 요새의 우거진 느릎나무 눈에 익었구나.
이때를 당하여 가장 마음 아픈 것은
백년동안 천하에 선우가 왕노릇 함이로다.
이 시에서 원에 세번째 갈 때 약소민족으로 겪고 있던 비분강개의 마음과 민족자존의 울분 그리고 몽고의 중원지배와 몽고풍속을 자조하는 우국충정의 뜻이 담겨 있다. 한편 위의 시에서 그는 이미 성리학의 정통사상을 수용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안향은 충렬왕 15년 연경에서 성리학을 수용한 이후 불교에 대해서도 부정적 측면에서 보게 된다. 그는 사원의 분에 넘치는 호사스러움을 보면서 도탄에 헤매고 있는 당시 민중들을 생각하게 되고, 이후 그는 불교배척의 선봉에 서게 된다. 사원의 호사스러움에 대한 비판은 충렬왕 20년(1294) 김해에 있는 감로사를 순방하고 지은 시에서 보인다. 당시 그는 동남도병기사가 되어 합포에 출진하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지공거로 소환하여 귀환하는 도중이었다.
거울 같은 물결 위에 나뭇잎 하나
휘황한 공중에서 금빛 빛나니 범왕성이로다.
영위의 푸른 빛은 아지랭이가 피어나고
석상 위에 졸졸 흐르는 물은 빗소리를 머금었다.
날은 따스하고 정원의 꽃은 비단같이 단장하였다.
서늘한 밤, 산위에 뜬 달은 희미한 빛을 보내도다.
근심스럽도다. 백성들은 도탄에서 혜어나지 못하니
포단에 기대어 남은 반생 지내볼까.
안향은 위의 시에서 휘황한 금빛으로 장식된 감로사의 화려한 모습을 보면서 지금 국난으로 도탄에 헤매고 있는 민중들의 삶을 근심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의 삶을 허송세월이었다고 하면서 자탄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바로 성리학적 사상을 수용한 그의 정치철학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3) 안향의 교육활동(敎育活動) |
그가 출생한 고종 30년은 몽고의 침입으로 국가가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던 시기이며, 과거에 합격한 원종 원년은 비록 최씨 무인정권은 타도되었지만 김준 등의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이다.
당시 고려의 교육상은 이미 무인집권기에 침체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이러한 침체상은 고종 19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원의 침입으로 더욱 가속화되고 있었다. 비록 그가 출생하던 고종 30년을 전후한 시기는 당시 집정자 최우가 국학을 수리하고 사미곡(私米斛)을 양현고(養賢庫)에 기고하여 학교교육의 중흥을 시도하고 있고, 또 고종 38년(1251) 강화도 화산동에 새로이 국자감을 창건하여 선성(先聖)의 진영을 봉안하는 등 학교교육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강화도에서의 일이고, 개경을 비롯한 전국은 몽고의 침탈로 학교교육은 부재의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원종 11년 개경으로 환도하였을 때 국자감을 비롯한 학교교육은. 거의 황폐화되고 있었다. 당시 국자감의 참상을 본 안향은 「제학궁시」를 지어 당시의 교육상을 개탄하고 있다.
곳곳마다 향등 밝혀 부처에 기원하고
집집마다 통소 불며 귀신을 섬기는데
오직 부자묘(夫子廟-문묘)는 수간(數間)만 남아 있어
뜰에는 봄 풀이 가득하고 사람의 자취 찾을 수 없네.
당시 사회상은 유교적 통치 질서가 이미 파괴되어 있었고, 정신적 지표를 상실한 당시의 일반적 사조는 불교에 의지하지 않을 수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강대한 몽고의 침입을 방어하기에는 국력이 부족하였고, 때문에 국가에서도 부처의 힘을 빌려 국난을 타개해 보겠다는 의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고종 38년에는 팔만대장경의 완성을 보게 된다.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당시의 사회상과 교육상을 목도한 안향은 유교적 통치이념의 확립과 교육의 중흥 기약하게 되고, 이러한 이념은 이후 그의 정치생활의 일관한 신조가 되었다. 특히 그가 행한 교육중흥은 고려후기에 새로운 학풍은 진작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제현은 그의 교육업적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① 나라에서 배반한 탐라를 치고, 동쪽의 왜에게 죄를 묻고, 정해년의 근왕(勤王)과 경인년의 도둑을 막는 일 때문에 일이 거의 20여 년이나 걸렸다. 선비들은 모두 갑옷과 투구의 차림으로 활과 창을 잡았고, 책을 끼고 다니며 글을 읽는 이는 열사람 중에 한 두 사람도 못되었다. 그리고 선배와 늙은 선비들은 모두 죽어서 문적(文籍)을 전하는 것이 실낱같이 겨우 이어질 뿐이었다.
② 대덕(大德)(충렬왕 23~33, 1297~1307) 말년에 문성공 안향이 재상이 되어 국학을 고쳐 짓고 상서(庠序)를 수리하여 이성․추적․최원충 등을 등용하여, 한 경서에 두 명의 교수를 두고 대궐 안에 있는 학교를 개방하여 내시․오군․삼관의 7품 이하와 중앙과 지방의 생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따라서 듣고 배우게 하였다. 또 죽은 낭중(郎中) 유함의 아들이 중이 되어 사주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사기』와 『한서』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불러오게 하고는, 윤신걸․김승인․서연․김원식․박리 등을 보내어 그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였다.
③ 이에 도포를 입은 선비와 지위가 높은 벼슬아치의 무리 중에서 경서에 능통하고, 옛 일을 알기를 일삼는 무리들이 많이 생겼다.
이제현(1287~1367)은 안향의 후학으로서 그의 교육활동을 직접 목격한 자이다.
앞의 내용 중에서
①은 안향이 교육중흥을 일으키기 전의 교육상을 서술한 것이고,
②는 안향이 행한 교육중흥에 대한 실상을 개진한 것이며,
③은 안향의 교육활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결과를 표현한 것이다.
안향이 한국사상사와 교육사에서 교육자로 크게 부각을 받게 되는 것은 충렬왕 27년 광정대부․찬성사의 직에 부임하여 관직을 은퇴할 때까지 행한 교육활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충렬왕 23년 첨의참리․세자이보로 임명되자 이해에 거재 후편에 정사를 신축하여 공자와 주자의 진영을 봉안하고 조석으로 참배하였다. 충렬왕 27년 원의 학관 야율희일(耶律希逸)이 와서 문묘의 참배를 요청하였는데 당시 문묘는 그동안의 병화(兵火)로써 몇 개의 집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예관은 안향의 정사로 그를 모셔 이를 성묘(聖廟)라 하고 알현하게 하였다. 야율희일은 이를 보고 전우가 협소하고 반궁의 제에도 어긋난다고 하여 왕에게 새로이 건물을 짓도록 건의하고 있다. 이에 안향은 정사를 국자감의 터로 국가에 기증하고 그는 양온동으로 집을 옮겼다. 이때의 사실을 『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① 야율희일이 돌아갔는데, 희일이 국왕에게 백성 다스리는 술을 말하고, 재보(宰輔)에게는 우국(憂國)의 일을 책하였다. 일찍이 국학의 전우가 좁고 추하여 심히 반궁의 제도를 잃었음으로 왕에게 말하였던 바, 드디어 문묘를 새롭게 하여 유풍(儒風)을 진작하였다.
② 충렬왕 30년 5월에는 국학에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또 사람을 강남에 보내어 육경과 제사(諸史)의 서적을 구입하여 오게 하니, 칠관십이도의 제생(諸生)으로 경을 끼고 수업받는 사람이 수백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또 『고려사절요』에서는 “국학에 섬학전을 설치하였다. 처음에 찬성사 안향이 학교의 교사가 크게 허물어지고 날로 쇠퇴하여 가는 것을 우려하여 양부(兩府)와 의논하기를 “재상의 직책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는데, 이제 양현고(養賢庫)가 탕진하여 교육에 쓸 자금이 없으니, 청컨대 6품 이상은 각기 은1근씩을 내고, 7품 이하는 등급에 따라 포를 내게 하여 양현고에 돌려 본전은 두고 이식을 받아서 영구히 교육의 자금으로 만들도록 하자.”라고 하니, 양부에서는 이를 따랐다. 그 사실이 왕께 알려지니, 왕이 내고의 금전과 양곡을 내어 이를 보조하였다.
이때 밀직 고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는 무인이라 하여 돈내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이에 안향이 여러 재상에게 이르기를, “공자의 교는 만세에 법으로 내려온 바이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자식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아우가 형을 공경하는 것은 누구의 가르침인가? ‘만일 나는 무부(武夫)인데 무엇 때문에 애 써서 돈을 내어 저 생도들을 가르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공자를 위하지 않는 것이니 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고세가 이 말을 듣고는 부끄러워하여 즉시 돈을 내었다.
향은 남은 돈을 박사 김문정에게 부탁하여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 칠십자(七十子)의 화상을 그리게 하고, 또 제기(祭器)․악기(樂器)와 육경․제자(諸子)․사(史)의 서적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향이밀직부사 이산(李㦃과 전법판서 이진을 추천하여 경사교수도감사로 임명하기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금내학관과 내시․삼도감․오고에서 학문을 닦고자 원하는 선비 및 칠관십이도의 제생(諸生)으로 경을 끼고 수업받는 사람이 문득 수백을 헤아리게 되었다.”라고 하여 당시 상황을 보다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위에서 당시 안향의 교육 열의를 알 수 있거니와 주목되는 것은 경사교수도감사에 대한 기사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 충렬왕 22년 정월조에 “경사교수도감을 설치하여 7품 이하로 하여금 경학을 학습케 하도록 하고, 또 일경일예(一經一藝)를 통한 사람은 우대하여 탁용할 것이며, 무릇 진사와 생도는 모두 방술(防戌)을 면하게 하라.” 라고 기술하여 경사교수도감의 설립에 대한 기사를 수록하고 있지만 충렬왕 30년에 안향에 의한 경사교수제의 운영은 『고려사』에서는 누락하고 있다.
『회헌선생실기』에는 이때 안향이 이산․이진을 경사교수도감사로 임용할 것과 이성․추적․최원충을 경사교수로 임용하도록 건의하였고, 또 한 경(經)에 두 명의 교관을 배치하여 일경양교수제로 교육을 운영하도록 하였다고 하고 있다. 실제로 당시 안향이 일경양교수제로 학교교육을 운영하였다는 것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는 누락하고 있지만, 앞에서 살펴본 이제현의 『역옹패설』에서 확인되고 있다.
충렬왕 27년 5월 야율희일의 건의로 개축하기 시작한 성균관 대성전도 안향이 섬학전을 설치한 다음 달인 충렬왕 30년 6월에 준공을 보게 된다. 이 대성전이 낙성되자 왕은 직접 국학에 행차하여 석전(釋奠)의 예를 행하였는데, 이때의 행례는 자못 성대하였다. 이것은 “왕께서 국학에 행차하시니, 홀연(忽憐)․임원(林元) 등이 수행하였는데, 칠관제생들이 관복을 갖추고 길에 나와 맞이하면서 왕의 덕을 기리는 가요를 바쳤다. 왕은 대성전에 들어가 배알하고 밀직사 이혼에게 명하여 입학송을 짓게 하였으며, 임원에게는 애일잠(愛日箴)을 짓게하여 생도들에게 보였다.”라는 『고려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안향은 국자감의 운영을 위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또 자신의 가전노비도 이에 헌납하였다. 이것은 『고려사』의 관계기록에서는 누락되었지만 조선시대 성종 7년(1476) 5월 도승지 현석규가 올린 상소와 이 해 8월 성균생원 윤속종 등이 올린 상소에서 확인 된다.
① (성종 7년 5월) 도승지 현석규가 상소하기를 “여산군 민발(閔發)은 처음 성균관 노(奴) 도치와 노 장생을 공신노비로 삼아 사패(賜牌)를 받았습니다. 성균관 노비는 원래고려 안향이 소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관(성균관)이 타인에게 이것을 주는 것은 불가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② (성종 7년 8월) 성균관 생원 윤속종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전조(前朝) 문성공 안유는 국학이 쇠퇴함을 애통히 여겨 가전노비를 성균관에 시납하여 금일에 이르렀습니다. 그 노비 중에서 서울에 있는 자는 오로지 문묘의 제향을 받들고 아울러 유생들의 조석공양을 받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외자는 신공을 바쳐 유생들이 사용하고 유탄(油炭)과 포진(鋪陣)의 경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위 ①의 내용에서 안향이 가전노비를 헌납한 사실이 확인되고, ②에서는 그 목적이 성균관 교육의 중흥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안향의 노력으로 학교교육은 크게 활성화된다. 「안자연보」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재사(齋舍)가 거의 모두 수용하지 못하였다. 모두 통경학고(通經學古)로써 일을 삼았다. 선생이 매일 조퇴 후에 입관하면 제생이 교관의 뒤를 따라 분정서립(分庭序立)하여 예를 행하였다. 그런 후에 당(堂)에 올라 학문을 강론하고 하루종일 토론하였다(고전에 이르기를 그 예가 한결같이 좌주․문생과 같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무인집권기의 교육의 황폐상을 지양하고 새로 전래된 성리학 사상을 주지로 교육을 중흥시키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이로써 학교교육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고, 이후 홍건적을 비롯한 외세의 침입으로 국학이 다시 불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공민왕 16년에는 이색(李穡)을 주체로 하는 교육개혁의 맥으로 연승되고, 또 조선시대에는 그의 학통을 계승하려는 학자들의 노력이 잇달아 중종 38년(1543)에는 소수서원이 설립되니,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서원의 시초가 된다.
4) 안향(安珦)의 사상(思想) |
안향의 교육사상은 성리학적 유학에 입각한 실천적 이념이었다. 그가 학교교육의 중흥에 전력을 다하였던 것도 학교교육을 통하여 성리학적인 역사인식을 배양하여 자주적 국가의식을 고취하는데 그 한 목적이 있었다. 그의 현실적 교육이념은 국학이 준공된 후 국자생들에게 행한 『유국자제생』(諭國子諸生)이란 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성인의 도는 현실생활에서 그 윤리를 실천하는데 있다.”라고 하여 학문을 일상생활의 보편적 행동에 대한 규범으로 정의하였다. 이로써 효와 충과 예와 신을 강조하였고, 또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기 위하여는 경(敬)을 근간으로 하여야 하며, 일을 함에 있어서는 정(精)과 성(誠)으로 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성리학적 윤리관을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특히 경과 정을 강조한 것은 이후 목은 이색이 그의 교육사상의 기조로 경과 공(恭)과 정성정(正性情)을 내세우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 한다.
[문성공 학훈 : 국학(國學) 제생(諸生)에게 유시한 글]
성인의 도(道)란 일상생활의 윤리에 지나지 않으니, 자식으로서는 효도해야 하고, 신하로서는 충성해야 하며, 예의로 집안을 다스리고, 믿음으로 벗을 사귀며, 몸을 닦는 것은 반드시 경(敬)으로 하고 일을 수행함에는 반드시 지성으로 하는 것 일 뿐이다.
저 불가는 어버이를 버리고 출가하여 윤리와 도의를 없애버리니 바로 일개 오랑캐 부류이다. 근자에 전란을 겪은 나머지 학교가 퇴락하여 선비가 학문을 할 줄모르고, 학문을 하는 자도 불서(佛書)를 즐겨 읽으며 허무적멸의 교리를 믿고 받드니, 나는 심히 통탄하는 바이다. 내가 일찍이 중국에서 주 회암(朱晦菴)의 저술을 본 적이 있는데, 성인의 도를 발명하고 선불(禪佛)의 학문을 배척하였으니, 그 공이 공자와 짝할 만하다. 공자를 배우려고 하는 자는 먼저 회암을 배우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제생들은 새로운 책을 읽으면서 부지런히 힘쓰고 태만하지 말라.
『安子褒蹟撮要 卷2』
諭國子諸生文 「出權陽村集」
聖人之道。不過日用倫理。爲子當孝。爲臣當忠。禮以制家。信以交朋。修己必敬。立事必誠Ã而已。彼佛者。棄親出家。滅倫悖義。卽一夷狄之類。近因兵戈之餘。學校頹壞。士不知學。其學者。喜讀佛書。崇信其杳冥空寂之旨。吾甚痛之。吾嘗於中國。得見朱晦菴著述。發明聖ñ人之道。攘斥禪佛之學。功足以配仲尼。欲學仲尼之道。莫如先學晦菴。諸生行讀新書。當勉學
無忽。
그는 불교를 배척하여 국자생들에게 “불교는 허무한 뜻을 펴는 이단이니, 이를 배척하도록 하라.”고 권하고 있다. 당시의 일반적 사조는 숭불사상이었고, 이것은 왕을 비롯한 조정 대신이나 당시 일반 민중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시대상에서 그가 불교를 배척한 것은 당시 사상적 배경에서 볼 때 혁명적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고려후기에 척불을 주창한 가장 최초의 학자는 바로안향이었을 것이다.
그는 국자생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성을 다하였고, 또 그들에게는 예를 크게 강조하였다. 이것은 『고려사』열전에서 “……제생으로서 선진에게 예를 다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향이 노하여 장차 벌하려 하니, 제생들이 사죄하는지라 향이 이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제생들을 보기를 내 아들과 손자 보듯이 하거늘, 제생들은 어찌이 노부의 뜻을 체득하지 못하는가.”라고 하고는 그들을 데리고 집으로 가서 주연을 베푸니, 제생들이 서로 말하기를 “公이 우리를 대하기를 이와 같이 성(誠)으로 하는데, 만약에 우리가 화복(化服)하지 않으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라고 하고는 순복하였다.”32 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학교교육에서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일관하였다. 관로에서 일을 처리할 때는 판단을 현명하게 하였고, 이로써 동열의 대신들도 모두 경복하여 따랐으며, 서로 다투는 일이 없었다. 『고려사절요』에 보이는 다음의 기사는 이를 말해준다.
…(안향은) 사람됨이 장중하고 안상(安詳)하니, 사람들이 모두 외경하였다. 상부에 있을 때 모사(謀事)와 판단을 잘하니, 동열이 순히 따르고 오직 삼가하여 감히 다투지 않았다.
이러한 안향의 교육사상은 이후 그의 후학들에게 전승되어 고려말에는 성리학이 학교교육의 이념으로 정착되었고, 이로써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게 된다. 조선시대에 이황은 그의 업적을 기려 그를 봉안한 서원의 사액을 왕에게 상주하였고, 인조 21년(1643)에 신익성은 그의 행장을 쓰면서 ‘동방이학(理學)의 조(祖)’라 하여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5) 학교와 교육진흥(敎育振興)이 나라의 살길 |
그가 찬성(贊成)이 되었을 때에 정부에 건의하기를 “양현고가 그 재정난으로하여 오로지 이름뿐이니 이를 위해서는 백관으로 하여금 각각 은포(銀布)를 내게하여 그 재정을 튼튼히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건의가 받아들여져 문무백관은 그들의 위품(位品)에 따라 기부금을 내게 되니, 즉 6품 이상은 은(銀)한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그것을 양현고에 보냈다. 그것을 융통시켜 나오는 이잣돈으로 학생들의 생활과 교육에 충당케 하였다. 1304년에는 오늘날의 육영재단에 해당되는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재정적으로 국자감의 운영에 있어 원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물론 흔히 그렇듯이 이러한 노력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즉, 이때 밀직(密直)의 직에 있던 고세(高世) 같은 이는 섬학전을 내기를 거부하였다. 이에 안향은 고세(高世)를 보고 말하기를 “공자의 도는 법을 만세에 끼치는 것이니 신하가 임금에 충성하고 자식이 어버이께 효도하며 동생은 형에게 공손하여야 되는 것인 바 이는 누가 가르쳐준 것인가. 만약 나는 무인이라 하여 돈을 내어 생도를 가르치고 싶지 않다면 이는 공자를 무시하는 처사이다.” 라고 하니 고세의 태도가 수그러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의 꿋꿋한 신념은 이제까지 위축되었던 국자감을 일으켜 세우고 나아가서는 많은 선비들을 직접 가르치니, 이로써 고려는 비록 국력은 쇠퇴해 가는 마당이었지만 교학은 크게 부흥되었다.
안향의 아들 우기(于器) 또한 충렬왕 때 등제(登第)하여 선비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 활약하였으며, 또 그의 손자 안목(安牧)도 밀직부사로 활약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부(孚)이시다. 이와 같이 그의 집안은 그의 주자학을 전래시킴으로써 여말을 장식한 많은 선비들을 속속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교학진흥정책은 여말을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답습되었으니 이 또한 그의 큰 공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섬학전의 설치와 더불어 많은 시책을 원나라로부터 사들여 오고 경전을 정리하고 , 한편 밀직부사치사(密直副使致仕) 이산(李㦃과 전법판서(典法判書) 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 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케 하여 교수하게 하였다. 이로써 유학이 크게 펼치게 되어 안향은 우리 나라 최초의 주자학자가 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