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 맥

 1) 학맥 형성의 배경

 

충렬왕 15년 안향이 원에서 성리학을 수용하고 귀국하자 일차적으로 그의 문하에 이름난 여섯학자(육군자)이었던 권부․우탁․백이정․이조년․이진․신천 등에게 이를 전하였다. 이들은 안향으로부터 성리학을 전수받고 이후 이를 보급하는 선봉에 서게 된다. 이들은 당시 학계에서 육군자란 호칭을 받게 된다. 이는 성리학의 본향 송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송조육현(宋朝六賢)이라고 부른 것과 같다. 이는 주돈이,정호, 정이, 장재, 소옹, 주희(주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는 교관직을 역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특히 충렬왕 27년 이후는 교육중흥의 책임을 맡아 성리학의 보급에 전념하였다. 이때 과거에 합격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그로부터 교육받은 제자이기도 하다.

 

또 그는 2차에 걸쳐 과거를 주관하여 많은 문생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이후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전수받게 되고, 또 그와 함께 과거에 합격한 동년과 그의 문인 유경․이장용의 문하에서 과거에 합격한 선후배의 동문들도 그와 교유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을 접하게 된다.

이밖에 그와 더불어 교육중흥을 선도한 당시의 교관들도 그로부터 성리학을 전수 받았고, 또 조정에서 같이 활동하였던 학자들 중에서도 그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이로써 고려후기에는 안향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학맥이 형성되면서 고려사회의 학문을 주도하게 된다.

 

안향의 학문은 최초로 성리학을 전수받은 육군자를 비롯하여 동년․동문․문생 및 그와 교유한 문인들에게 계승되고 있으며, 이들은 이후 과거의 고시관 또는 대사성을 비롯한 교관직을 역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생 및 문도들에게 전승하게 된다. 이로써 고려후기는 성리학이 정치사회의 기저로 정착되어 갔다.  

안향의문인

 

 

 2) 안향 문하의 육군자(六君子)

 

안향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권부․이진․우탁․이조년․백이정․신천 등을 일차적으로 들 수 있다. 이들은 당시 학계에서 소위 육군자로 불리던 사람들로서 안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그로부터 성리학을 전수받고 이를 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하게 된다.

 

이것은 「안자연보」에서 “…(안향은) 육군자로 불려지던 그의 문인 국재 권부․역동 우탁․동암 이진․매운당 이조년․이재백이정․덕재 신천 등과 더불어 의리를 강론하고 또 정학을 창도하는데 힘썼다.” 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고, 또 「매운당선생기년」에서 “안향은 문인 권부․우탁․우진․백이정․이조년․신천 등과 더불어 서부의 대암상(권부의 가택이 있는 반타석)에서 강론하였으니 그때 사람들은 이들을 사원(士園)의 육군자라 하였다.”

 

(1) 이진(李瑱, 1244, 고종31~1321, 충숙왕8)

그는 안향과 친분이 두터웠다. 연령상으로는 안향과 불과 1년의 차이였지만 그가 과거에 합격하던 충렬왕 5년(1279)에 안향은 국자사업으로 있어 정치적 기반이 성숙되고 있었던 시기이다. 그는 안향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많은 교유를 가졌고, 또 관로에서도 같이 활동하였다. 그가 충렬왕 20년(1294) 경산의 태수로 있을 때 안향은 동지밀직사사로서 동남도병마사가 되어 합포에 출진하고 있었는데, 마침 조정으로부터 지공거의 임명을 받아 소환 당하게 된다. 이에 안향은 귀경하게 되는데, 도중에 경산을 들러 이진을 방문하고는 「자합포부과소도경산」이란 시를 지어주고 서로 정담을 나누고 있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정승을 제수하고 임해군에 봉하였다. 충숙왕 원년 6월(1314)에는 찬성사 권부, 삼순사 권한공, 평리 조간, 지밀직 안우기 등과 더불어 성균관에 모여 강남에서 새로 구입한 경적 1만8백여 권을 고열하였다. 이때 성리학에 대한 서적이 대량 입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안우기와 더불어 이일을 담당하고 있는데 안우기는 바로 안향의 아들이다.

 

충숙왕 2년(1315) 정월에는 고시관이 되어 윤혁과 더불어 과거를 주관하여 박인간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이때의 과거에서 민사평․조렴 등과 더불어 안목도 합격하고 있는데, 안목은 안향의 손자이며, 그의 아들 제현과는 벗이기도 하다. 충숙왕 8년에 죽으니 향년 78세였고, 조정에서는 문정이란 시호를 내렸다.

 

(2) 백이정(白頤正, 1247, 고종34~1323, 충숙왕10)

백이정은 타고난 품성이 순후하여 공보(公輔)의 기(器)가 있었으며,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많은 학문적 영향을 받게 된다. 그의 아버지 백문절은 안향과 국자감에서 같이 교관으로 재임하였고, 이들의 친분도 각별하였다. 또 안향의 아들 우기(于器)는 백이정이 과거에 합격하기 전의 과거에 합격하여 이들 사이에도 서로 교유관계가 있었다. 이와 같이 볼 때 백이정은 비록 안향과는 몇 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그를 스승으로 사숙하였을 것이며, 또 직접 국자감에서 교육도 받았을 것이다.

 

충렬왕 24년(1298)에 충선왕은 즉위한 지 8개월만에 퇴위하고 원에 가게 된다.

이때 그는 충선왕을 호종하여 원에 갔고, 이곳에서 10년 동안 숙위하면서 그 동안에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다. 10년 후인 충렬왕 34년(1308)에 왕이 죽자 충선왕이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오르는데, 이때 그도 충선왕을 따라 귀국하게 된다.

그는 귀국하면서 그 동안에 수집한 정주(程朱)의 서를 가지고 왔으며, 이로써 당시 학계는 성리학의 연구에 활기를 띄게 된다.

 

백이정은 충선왕 2년(1310)에 왕의 신임을 받아 녹봉을 받는 검교재신으로 임용되었고, 충숙왕원년(1314)에는 첨의평리가 되어 상의회의도감사를 겸하였으며, 후에 상당군으로 봉작되었다. 충숙왕 10년(1323)에 죽으니, 향년 77세이다. 충숙왕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문헌이란 시호를 내렸다.

 

(3) 신천(辛蕆 ?~1339, 충혜왕 복위 즉위년)

경상도 영산인으로 호는 덕재이다. 충렬왕 20년에 안향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숙왕 원년(1314)에 선부직랑이 되었고, 충숙왕 13년(1326)에는 국자감시의 시관이 되어 이달중 등을 선발하였다. 충혜왕 복위 즉위년에 판밀직사사로서 죽었다. 그동안에 총랑을 역임하였다.

그는 안향의 문생으로 권부․백이정․우탁․이조년․이진 등과 교유하여 성리학을 연마하였으며, 당시에 육군자의 한명으로 존경을 받았다. 충숙왕 6년에는 안향을 문묘에 종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것은 『고려사절요』에서 “문성공 안향을 문묘에 종사하게 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향은 비록 국자감에 섬학천을 설치하도록 건의하여 인재를 양육한 공적은 있지만, 어찌 이것으로서 그를 문묘에 종사할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향의 문생 총랑 신천이 극력 주장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다.” 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 보이고 있다.

 

(4) 우탁(禹卓, 1262, 원조3~1342, 충혜왕 복위3)

우탁은 단산인(丹山人)으로 자는 천장 또는 탁부라 하였고, 호는 단암 또는 백운당이라 하였으며, 세칭 역동선생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원종 3년(1262) 단산현품달리 신원(현재 충북 단양군 적성리)에서 문하시중으로 추증된 천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과 지조가 바르고 곧았으며, 천품이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충렬왕 4년(1278) 17세로 향공진사에 선발되고, 충렬왕 16년(1290)에 29세의 나이로 정당문학 정가신․판비서사 김변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는 권부와 동갑으로서 권부가 성균시에 합격한 2년 후에 향공진사에 합격하여 국자감에서 수학하였던 것 같다. 충렬왕 4년에 안향은 국자사업으로 있었는데, 그가 이때 안향으로부터 수학하였다는 것은 『역동선생실기』에서 『동국연원록』의 내용을 인용하여 “선생이 어릴 때 회헌선생 유에게서 처음으로 학문을 배웠다.”라고 하였고, 또

『동국문헌록』에서 “회헌의 문하에 경을 끼고 수업받는 사람이 칠관십이도를 비롯하여 수백명에 이르렀다. 그 도를 깨닫고 이를 후세에 전하는데, 특히 공을세워 유림에 기록된 사람은 역동을 비롯하여 덕암 신천․상당 백이정․국재 권부 4명 뿐이다.” 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 보이고 있다.

 

충렬왕 16년(1290)은 안향이 왕을 호종하고 원에 갔다가 귀국하던 해이며, 성리학을 최초로 전래하였던 시기이다. 우탁은 향공진사로 선발되어 중앙에 선상된 17세 이후 안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과거에 합격하던 해에는 안향으로부터 성리학을 전수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과거에 급제한 후 영해사록을 제수 받아 행한 치적에서도 보인다.

 

이때 행한 그의 치적에 대하여 『고려사』열전에는 “탁은 등과되어 처음 영해사록에 선임되었는데, 군에 요괴한 신사가 있어 이름을 팔영이라 하였다. 이로써 백성들은 귀신들의 장난에 유혹되어 봉사를 심히 번독하게 하였다. 탁이 이르자 곧 이를 부숴 바다에 던지니, 마침내 음사가 드디에 끊어졌다.” 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충렬왕 원년에 안향이 상주판관으로 부임하였을 때 무녀들의 농간을 퇴친한 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5) 권부(權溥, 1262, 원종3~1346, 충목왕2)

권부는 충렬왕 5년(1279) 찬성사 박항과 전법판서 곽여필의 문하에서 나이 18세로 과거에 등제하였고 다음해에 문신 친시에 합격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는 성품이 충효하고 자혜하여 왕으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아 관로가 순탄하였고, 충숙왕 때에는 첨의정승․판총부사를 제수받고 영가부원군에 봉작되었다. 충렬왕 27년(1301)에는 지공거를 맡아 이제현․박원계․노승관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이들 중에서 이제현은 고려후기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그도 성리학에 깊은관심을 가져 『주자사서집주』를 간행하여 성리학의 보급에 힘썼다.

 

『고려사』열전에서는 이러한 그의 노력을 크게 평가하여 “부(溥)는 성품이 충효하고 친족과 인척들에게 자혜스러웠고, 또 동료나 친구들에게도 화목하였으며, 독서를 즐겨 늙어서도 쉬지 않았다. 일찍이 주자의 『사서집주』를 널리 펴도록 건의하여 이를 간행하니, 동방의 성리학이 부로부터 시작되었다. 『은대집』 20권을 주석하였으며, 또 아들 준과 더불어 역대의 효자 6명을 모아 책을 만들어 사위인 이제현으로 하여금 찬을 짓게 하고 이름을 『효행록』이라 하니 세상에 널리 행하였다.” 라고 하여 그를 동방 성리학의 최초 전래자로 부각시키고 있다.

 

(6) 이조년(李兆年, 1269, 원종10~1343, 충혜왕 복위4)

이조년은 원종 10년 경산부 용산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원로이다. 증조는 돈문이고, 할아버지는 득희이며, 아버지는 장경인데 모두 부사를 지냈다. 『고려사』에서 그의 인품에 대하여 “어려서부터 지절이 있어 학문에 힘썼고, 공검하고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라고 하였고, 이제현은 그의 묘지명에서 “공의 사람됨은 비록 키는 작았지만, 재기가 정한(精悍)하여 뜻이 확실하고 과감히 말하였다.

 

이로써 가는 곳마다 명성을 떨쳤고, 또한 공적이 빼어났다. 특히 그의 대절(大節)은높이 살만하다.” 라고 하였다.

 

그는 충렬왕 11년(1285)에 향공진사로 선발되니 이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충렬왕 20년(1294)에는 안향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는 17세에 향공진사에 합격한 이후 안향의 문하에 출입하였던 것 같다. “이조년은 17세에 향공진사로서 내과에 등제하여 회헌선생 유를 중경 태묘동으로 찾아가 뵙고 가르침을 청하였다.”49 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안향의 문하에 계속 출입하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3) 한국 성리학(性理學)의 흐름

 

우리나라 성리학은 이를 도입하고 육군자를 비롯한 후학과 문생을 기른 회헌안향(安珦)으로 시작되어, 6군자(권부, 백이정 외)-익재 이제현(李齊賢)-가정 이곡(李穀)-목은 이색(李穡)을 거쳐 포은 정몽주(鄭夢周)-야은 길재(吉再) 그리고 양촌 권근(權近)-송정 김반(金泮)으로 흐르고, 이어 강호 김숙자(金叔滋)-점필재 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고, 다시 두 제자 일두 정여창(鄭汝昌)과 한훤당 김굉필(金宏弼)로 흐르고, 김굉필은 정암 조광조(趙光祖), 모재 김안국(金安國) 서봉유우(柳藕), 신당 정붕(鄭鵬)으로 이어졌다.

 

정암 조광조는 문하 청송 성수침(成守琛)-우계 성혼(成渾)-추포 황신(黃愼)과 우산 안방준(安邦俊)으로 이어졌고, 또 탄수 이연경(李延慶)-화담 서경덕(徐敬德)-정산 박주(朴洲)와 사암 박순(朴淳)으로 내려갔다.

 

김굉필 문하 김안국은 하서 김인후(金麟厚)로 이어지고, 사제간은 아니지만 이는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李珥)로 이어졌다. 퇴계는 월천 조목(趙穆), 서애 유성룡(柳成龍), 학봉 김성일(金誠一), 고봉 기대승(奇大升), 한강 정구(鄭逑)에게 이어졌고, 율곡은 사계 김장생(金長生), 중봉 조헌(趙憲), 수몽 정엽(鄭曄)에게 전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