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공 영정기록
1. 백운동서원 창건 시말 [白雲院創建識] |
주선생(周先生)이 신축년(1541, 중종20) 6월에 기천(基川) 군수로 부임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농사에 힘쓰는 일을 급선무로 하였다.
향교가 기울어지고 무너졌는데 대성전은 새롭게 짓는다 하더라도 서재가 빠져있었고 터가 비좁아 중수하기에 미흡하였다. 그래서 옮길 계획을 하였으나 가뭄 재해가 심한 것으로 인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진사 황빈(黃彬) 군이 미곡(米穀) 15석을 바치자 방백(方伯) 이청(李淸)52에게 향교 이건(移建)을 청하여 터를 잡아 새로 향교를 건립하였고. 그 이듬해 임인년(1542, 중종21)에 다시 방백 임백령(林百齡)에게 청하여 많은 어염(魚鹽)을 보조받았다.
그리고 죽계 상류에 문성공의 사당을 창건하고 사당앞에 또 서원을 건립한 후, 남은 자금으로 선비의 학업에 이바지하려 했으나 자금이 부족하였고, 그 이듬해 계묘년(1543, 중종22)에 이언적(李彦迪)이 임백령의 후임으로 방백이 되어서 또한 염곽(鹽藿)을 내려주었다. 황빈이 다시 45석을 바치자, 이에 약간의 보미(寶米)55를 세우고 학전(學田)을 마련하여 서원으로 귀속시켰으며, 또한 전날 문성공 사당의 터를 다듬다가 얻은 놋쇠 1백여 근을 서울로 보내 서적을 구입하여 서원에 비치하였다.
선생이 이처럼 향교를 중건하고 서원을 창건함에 있어서도 시의(時宜)를 중히 여겨 농사짓는 틈을 택하여 역사(役事)를 시행하였고, 관속(官屬)을 부리거나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으며, 위로는 방백(方伯)의 힘을 입었다. 황군(黃君)의 힘도 적지 않았다.
나는 자신의 사재(私財)로 사찰을 돕고 가산을 모두 털어 시주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식견이 있는 사람까지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선생이 경영한 두 곳은 모두가 선사(先師)를 높이고 교육을 바로세우는 일들로서 불교 적멸(寂滅)의 도리와 다르니, 무릇 사람의 천성을 가진 자라면 의당 다투어 협찬해야 함에도 도리어 세찬 비난을 퍼부었는데, 유달리 황빈 만이 이처럼 하였으니 이른바 ‘선인(善人)’이라 하지 않겠는가.
아, 순흥은 궁벽한 산중의 한 고을이며, 순흥부가 없어진 이후 마을에 어진 선비가 없고 풍속에 염치의 기풍이 없어 사람들이 인의(仁義)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였다. 주선생이 사당을 세워 선사를 높이고 서원을 세워 후학을 인도하되 진실에 근본하고 공경으로 주를 삼아 남에게 명예를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신임을 얻었고, 몇 년이 못 되어 선비가 지향할 바를 알아 흥기하고 절로 새롭게 되었으니, 주선생이 순흥 고을 사람에게 끼친 공이 어찌 적다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찌 하나의 순흥부 뿐이겠는가. 순흥을 시작으로 사방으로 이어지고 사방에서 다시 온 나라에 미쳐,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가 될 것이다. 그가 한 일은 수기치인(修已治人)의 학문과 화민성속(化民成俗)의 치도(治道)에 큰 도움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선(善)을 좋아하는 선생의 마음에 감복하고 시기하고 헐뜯는 말을 하는 것이 개탄스러워, 그 전말을 기록하여 이 서원을 세우면서 관청의 재물을 쓰지 않고 백성의 힘을 빌리지 않았음을 밝히는 바이다.
가정 병오년(1546, 명종1) 3월 갑자일에 김중문(金仲文) 쓰다.
[白雲院創建識] 『김중문, 雲院雜錄』
2. 소수서원 기문 |
서원 터가 있었던 것은 옛날 일이고 그 터로 인하여 서원을 창건한 것은 오늘날의 일이다. 서원 이름을 ‘소수(紹修)’라고 한 것이 어찌 그 연유가 없겠는가. 이 터는 옛날 순흥부 소백산 아래 백운동에 있다. 소백산 줄기가 벋어내려 수려한 정기가 응결되어 한 분 대현(大賢)이 태어났으니 바로 우리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이다.
공은 고려 말 불교가 크게 성행하고 도의가 쇠퇴해진 시기에 당하여, 사문(斯文)을 흥기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고, 성현의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주자의 영정을 그려 벽에 걸어놓고 항상 경모(景慕)하며 스스로 몸을 검속하였다.
내면에 지성(至誠)을 간직하고 행실이 독실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지극할 수있었겠는가. 아, 이점이 실로 우리나라 도학의 종주(宗主)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지금에 이미 수백여 년의 세월이 흘러 공의 유지(遺址)가 황폐하여 잡초에 묻히고 그 아름다운 전통이 희미해져서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가정(嘉靖) 갑진년(1544, 중종39) 사이에 이곳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개연히 탄식하고 공의 유허(遺墟)를 찾아서 안씨의 후손인 안정(安珽)과 함께 사당 건립을 도모하고, 공의 영정을 구하여 봉안하였으며, 또한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과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를 좌우로 배향하니 모두 문성공의 친족이다. 이 어찌 공의 궤범(軌範)을 잇고 학문과 덕을 닦아 백세의 먼 훗날까지 길이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시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당 옆에 별도로 서원을 지으려고 터를 다지다가 얻은 놋쇠로 약간의 경서(經書), 사서(史書), 제자서(諸子書)를 구입해서 서원에 소장하고 원근(遠近)의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삼게 하였다. 또 안씨의 세계(世系)와 행장(行狀)을 수집하고 도학(道學)의 규모와 지침이 되는 글을 상세하게 편집하여 『죽계지(竹溪誌)』라 이름하고 아울러 소장하니, 그 애쓰고 지성스럽게 한 뜻이 매우 간절하였다.
그 후 이황(李滉) 선생이 주세붕의 뒤를 이어 이곳에 부임하여 더욱 서원의 일에 힘쓰다가 병환으로 사임하고 돌아가면서 관찰사에게 글을 올려, 서원을 유지하여 한 도(道)의 선비들이 심학(心學)을 공부하게 하여 선현(先賢)의 도를 잇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 내용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였다. 이에 관찰사 심통원(沈通源)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조정에 아뢰었고 성상께서 윤허하여 정원(政院)에 명하기를, “사액함이 옳다.” 하였다.
이에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이 어명을 받아 서원의 편액을 ‘소수(紹修)’라 하였으니, 이 두 글자로 서원 이름으로 정한 것은 실로 까닭이 있다.
그 까닭이란 무엇인가? 하늘의 명(命)을 받은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에 따라 행함을 도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학문이라 한다. 무엇을 학문이라 하는가? 사물을 궁구하여 그 앎을 극대화하고, 한결같이 성(誠)에 바탕을 두고 경(敬)을 유지하며, 고명(高明)의 극치에 이르고 중용(中庸)으로 말미암음을 말한 것이다.(중략)
문성공 이후로 문정공과 문경공이 계승하였고, 문정공과 문경공 이후로 주신재와 퇴계가 또한 계승하였으니, 그 학문을 추모하여 끊임없이 계승하는 것이 후학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이 서원이 ‘소수’라는 이름을 얻은 것에 깊은 뜻이 있으니, 그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한다면 후학들에게 경모(敬慕)하는 마음을 흥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은 이발(李渤)이 거처했던 곳이고, 이발의 자취를 이어서 그 유허를 널리 개척한 이는 주자(朱子)이다. 오늘날 백운동을 백록동에 견주고 서원의 흥폐도 그곳에 견준다면 이 역시 소수(紹修)라고 할 수있다.
아, 이 어찌 아무런 뜻이 없이 이름 붙인 것이겠는가!
[紹修書院記] 조징(趙澄) / 『雲院雜錄』
3. 죽계지 서문 [竹溪志序] 주세붕/《竹溪志》 |
가정(嘉靖) 신축년(1541, 중종36) 가을 7월 무자일(戊子日)에 내가 풍기(豊基)에 도착하였는데, 이해에 큰 가뭄이 들었고 명년 임인년(1542, 중종37)에도 큰 기근이 들었다. 이해에 백운동(白雲洞)에 회헌선생(晦軒先生)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 계묘년(1543, 중종38)에 향교(鄕校)를 고을 북쪽으로 옮겼으며, 또 사당 앞에 따로 서원(書院)을 세웠다.
이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심하도다, 그대의 세상물정에 어두움이여! 향교를 옮긴 것은 그렇다 해도 문성공의 사당과 서원을 세우는 일은 그만둘 수 없었는가? 문성공은 이미 국학(國學)에 종사(從祀)되어 고을마다 사당이 있는데 왜 굳이 사당을 세우며, 이미 학교가 있는데 왜 꼭 따로 서원을 세울 필요가 있는가? 흉년을 당하였으니 그럴 시기가 아니며, 낮은 지위에 있으니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사당과 서원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하니 너무 지나친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내가 답하기를, 글쎄. 내가 보건대 주자(朱子)가 남강(南康)을 다스린 1년 사이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중수하였고, 또한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의 사당과 다섯 분 선생의 사당, 그리고 세 분 선생의 사당을 세웠고, 또한 유둔전(劉屯田)을 위하여 장절정(壯節亭)을 지었다. 그 당시엔 금(金)나라가 중국을 함락하여 천하가 피비린내로 가득하였고, 남강지방은 계속된 큰 흉년으로 벼슬을 팔아 곡식으로 바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그 당시 위태로움과 곤궁함이 그토록 심하였는데도 그가 세운 서원과 사당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늘이 뭇 백성들을 낳음에 사람이 사람다운 이유는 바로 교육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교육이 없었다면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고 지아비는 지아비답지 못하고 지어미는 지어미답지 못하고 어른은 어른답지 못하고 어린이는 어린이답지 못하게 되어, 삼강(三綱)과 구법(九法)이 없어져서 인류가 멸망한 지 이미 오래 되었을 것이다.
교육이란 반드시 현인을 높이는 것에서 비롯되므로 사당을 세워 덕 있는 이를 숭상하고 서원을 세워 학문을 돈독히 하는 것이니, 실로 교육은 난리를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급한 일이다. 어떤 말에 보면 ‘세속으로 말하면 긴요함이 없는 듯하나, 지금 실정으로 보면 인심과 정사의 체모에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다. 오늘날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는 바로 이 교육과 더불어 서로 표리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아, 회옹(晦翁)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죽계(竹溪)는 바로 문성공의 궐리(闕里)이다. 교육을 세우려고 한다면 반드시 문성공을 높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가 보잘것없는 몸으로 태평한 세상을 만나 외람되게 이 고을 군수가 되었으니 고을을 위하여 그 책임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사당과 서원을 설립하고 토지를 마련하고 경전을 소장하기를 한결같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고사에 따라 하고서, 무궁한 후일에 훌륭한 인물을 기다리게 되었다. 따라서 시기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사람들의 믿음 또한 아랑곳하지 않았다.
옛날 사사분(司士賁)이 평상 위에서 시신을 염하기를 청하자, 자유(子游)는 이를 허락하였으나 현자(縣子)는 이 말을 듣고 꾸짖기를 ‘지나치도다, 숙씨(叔氏)가 남에게 마음대로 예를 허락함이여!’ 라고 하였으니, 자유가 예문에 근거하지 않고 독단으로 말한 것은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은 모두 회옹을 본받은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반드시 살피고 어진 이는 반드시 이해할 것이니, 무슨 지나침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주자의 어짊은 맹자에 앞서고 공적은 공자와 짝할 만하여 분명 평범한 사람이 미칠 수 없는 신묘한 교화의 힘이 있었지만, 주자가 남강을 떠난 지 10년이 채 못 되어 장절정의 문과 담장과 정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 후임 증치허(曾致虛)가 다시 개축하여 옛 제도를 넓혔으니, 주자 또한 부족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그대가 아무리 노력하여 사당과 서원을 세우더라도 10년간의 보존을 기대할 수 없고, 또한 증치허와 같은 후임이 없다면 오늘날의 조소와 멸시뿐 아니라 후일에 비난을 받을 것이다. 성현을 배움에 있어서는 그 마음을 본받아야 하니, 만일 그와 같이 어질지 못하면서 한갓 그 행적만을 답습한다면 또한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나는 이에 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그 마음을 스승으로 삼으면 반드시 그 행적을 따라야 하는 것이니, 그 행적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성현의 행적을 피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장차 향원(鄕愿)의 행적을 따르게 될 것이니, 어리석음을 면하려다 오히려 향원에 빠질까 두렵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기재된 사당은 1천 2백여 개소이고 서원은 3백여 개소이다. 또 기록되지 않은 곳은 얼마나 될 것인가. 오늘날 모든 산봉우리마다 사찰이 있어 금빛 불상을 받들고 있는데도 이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이고을에 하나의 사당과 하나의 서원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이 바로 주자가 여산(廬山)의 서원을 보고 크게 탄식한 것이다. 이를 건립함은 나에게 있으나 이를 보존함은 저들에게 있다. 내가 한 일은 실로 내가 책임지겠지만 저들이 할 일을 어떻게 걱정하겠는가. 주자 같이 큰 현인을 만나 오래도록 전해짐도 천명이고, 증치허 같은 이를 만나지 못하여 오래 전해지지 못함도 천명이니, 그 천명을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주자는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중수할 때 반드시 조정에 아뢴 후에 하였는데, 그대가 백운동 서원을 세우면서 조정에 아뢰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백록동서원은 선대 제왕의 명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아뢴 것이나, 기타 서원은 아뢴 적이 없었다.
하였다. 그가 또 다시 말하기를,
문성공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노비를 바쳤으니 그 근실한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학문에 대하여 듣고 싶다.
하기에, 답하기를,
고려의 사관(史官)이 도학을 알지 못하였기에 그의 공은 말할 수 있었으나 그의 학문을 천명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는 늘 『고려사(高麗史)』를 읽다가 「문성공전(文成公傳)」에 이르러 탄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이 삼별초(三別抄) 적중에서 탈출한 일, 요사스런 무당을 매질한 일, 원나라 황제에게 규방(閨房)의 일에 대하여 변론한 일, 학교 진흥에 진력한 일, 당신의 몸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일, 인재를 알아본 안목 등은, 그 높은 경지를 따져볼 때 큰 현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직 그는 장중하고 자상하였으며 일을 꾀함에 유능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그리고 공자를 논함에 있어서도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며 아우가 형을 공경하는 것이 모두 누구의 가르침인가’ 라고 하여 해와 별처럼 밝게 천명하여 만고에 전하였고, 무인(武人)을 감복시켜 섬학전을 내게 하였으니, 또한 사문에 기여한 공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은 또한 노년에 이르러 항상 주자의 영정을 걸어 놓고 사모하며 ‘회헌(晦軒)’이라 자호(自號)하였는데, 주자를 사모함은 곧 공자를 사모함이다. 공의 어짊과 용기는 죽음에 이르도록 조금도 해이됨이 없었고, 지향할 바의 바름을 말한 것은 삼한(三韓)의 풍속을 일신하여 익재(益齋) ․ 포은(圃隱)과 같은 분이 그 영향을 입었다. 본조에 이르러 삼대처럼 예악의 교화가 융성하였고 이후 340여 년 동안 천리(天理)가 다시 밝고 문풍이 크게 진흥되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힘인가
공은 실로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조종이다. 비록 설홍유(薛弘儒) ․문창(崔文昌)과 같은 훌륭한 유학자도 그와 흡사하다고 말할 수 없는데, 그 나머지야 어떻게 더 말하겠는가.
아, 공의 사적이 이러한데도 문묘에 종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안모(安某)가 섬학전을 마련한 공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하였으니, 사관의 식견이 비루함이 이런 정도이다.
공의 시에
‘곳곳마다 향불 피워 부처에게 빌고 / 집집마다 피리 소리 신을 섬기네 / 유독 두어 칸 공자 사당엔 / 봄풀만 가득하고 찾는 이 없어라
[香燈處處皆祈佛。簫管家家盡事神。獨有數間夫子廟。滿庭春草寂無人。]’라고 읊었으니,
사교(邪敎)를 배척하고 정도를 걱정한 뜻이 지극하다.
또한 공의 본전(本傳)에서 ‘문장이 맑고 굳세어 볼 만하다.’ 하였으니, 그의 저서가 틀림없이 많았을 터인데 후세에 전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공이 숨기고서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점필재(佔畢齋)는 그의 청초한 시풍을 사모하여 『청구풍아(靑丘風雅)』에 한 구절의 시를 실었는데, 그 시에
‘아침 비에 싱그러운 들위로 비둘기 한 마리 날고 / 봄바람에 꽃이 만발한 성을 필마로 돌아드네 [一鳩曉雨草連野。匹馬春風花滿城 。]’ 하였다.
이 시의 기상은 마치 천지의 조화와 같으니 열네 글자를 깊이 음미해 보면 공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의 학문이 비록 주자에 미치지 못하나 마음은 주자의 마음이기에, 나는 안회헌의 마음을 보려고 하면 마땅히 주자의 글을 보고 회옹의 얼굴을 보려고 하면 마땅히 회헌의 영정을 보라고 말할 것이다. 드디어 『죽계지(竹溪志)』 몇 편을 편찬하면서 국사에 실린 행록(行錄)을 책머리에 엮었고, 기타 존현록(尊賢錄) ․ 학전록(學田錄) ․ 장서록(藏書錄) ․ 잡록(雜錄) 등은 반드시 주자가 지은 것을 편 머리에 드러내어 주자를 경모한 공의 뜻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의 학설은 모두가 중니 ․ 안자 ․ 증자 ․ 자사 ․ 맹자 ․ 두 정자의 학문의 요지인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서 후세의 위인지학(爲人之學)과는 그 의리(義理) ․ 내외(內外) ․ 정조(精粗) ․ 본말(本末)에 있어서 천양지차가 있다.
이 책을 읽는 이가 참으로 공경을 위주로 하여 근본을 세우고, 먼저 공의 본전을 읽으면서 공이 주자를 사모한 것이 무슨 마음이고 주자가 공에게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한 것이 어떤 도였는가를 반드시 찾아서, 공이 주자를 존경했던 도리로 공을 존경하여 천만 번 마음을 씻은 뒤에 주자의 모든 저서를 숙독한다면,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바가 반드시 눈앞에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 나타난 바로 인하여 그 전체를 궁구한다면 자신에게 돌이켜 지성을 유지함도 나의 일이고 힘써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게 하는 것도 나의 일이 될 것이다. 그 즐거움이 장차 자신도 모르게 춤을 추게 되고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니, 어느 겨를에 외물(外物)을 생각하겠는가. 안연(顔淵)·중궁(仲弓) 두 사람이 ‘행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한 말의 뜻이 또한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내 실로 어리석어 성인의 도를 듣지 못하고 이미 늙었으니 이제 와서 뉘우친들 어찌 미치겠는가.
그러나 또한 마음에 새겨서 사모해야 할 바이기에, 우선 글로 써서 서원에 와서 공부하려는 동지·후학들에게 경건히 고하는 바이다.
갑진년(1544, 중종39) 겨울 10월 갑술일에, 상주(尙州) 주세붕(周世鵬) 쓰다.
4. 회헌영정 봉안기 |
원나라 대덕(大德) 10년 병오년(1306, 충렬왕32) 9월 12일에 문성공(文成公)이 졸하였다. 연우(延祐) 5년 무오년(1318, 충숙왕5) 2월에 상이 영정을 그려 문묘(文廟)에 들여놓도록 명하였다. 당시 흥주수(興州守) 최림(崔琳)이 모사하여 고을 향교에 봉안하였다.
정축년(1457, 세조3)에 고을이 폐지되어 한성(漢陽)의 안씨(安氏) 대종가(大宗家)에 옮겨 봉안하였다. 가정(嘉靖) 20년 신축년(1541, 중종36)에 군수 주세붕이 기천(基川)에 부임하였고, 이듬해 임인년(1542, 중종37) 가을에 비로소 죽계(竹溪) 가에 사당을 세웠다.
계묘년(1543, 중종38) 3월 초4일에 문성공 13세손 전 주서(注書) 안정(安珽)이 모시고 왔는데 사당 공사가 다 끝나지 않아 고을 서쪽 작은 정자에 임시로 봉안하였다가, 그해 가을에 사당이 이루어져서 8월 11일 사당에 봉안하고 특생(特牲)으로 제사를 올리고 고을 노인들을 크게 모이게 하였다.
이해 겨울 10월에 김중문(金仲文)이 기록하다.
5. 문성공 유상 봉안 발문 |
공의 유상(遺像)이 옛날에 순흥부(順興府) 향교에 있었는데, 정축년(1457, 세조3)의 변란에 고을이 없어지면서 한양(漢陽)의 대종가(大宗家)로 이안(移安)되었다. 내가 공의 종손(宗孫) 전 주서(注書) 안정(安珽)61의 집에서 한 번 배알한 적이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근엄하고 가까이서 대하면 온화하여 진정 대인군자의 모습이었고, 마치 친히 기침소리를 듣는 것 같아 마음속으로 늘 잊을 수 없었다. 계묘년(1543, 중종38) 3월에 주서가 내가 사당[廟]을 세운다는 말을 듣고 영정을 모시고 남쪽으로 와서 고을 서쪽 정자에 임시로 봉안하였다가 8월 계미일에 비로소 새사당에 봉안하였다. 공의 옛집은 폐부(廢府) 순흥 성 남쪽에 있었는데, 부서진 기와와 무너진 담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새 사당은 성 북쪽에 있으니 곧 숙수사(宿水寺) 옛터이다. 서로 바라보이는 것이 겨우 소가 울면 들릴 정도로 가깝다. 공이 소년 시절에 이곳에서 독서하였으니, 더욱이 감회가 일지 않을 수 없다.
죽계(竹溪)가 그 왼쪽으로 돌아 흐르고 소백산(小白山)이 오른쪽에 솟아 있으니, 구름 ․ 산 ․ 언덕 ․ 물이 정녕 여산(盧山)에 뒤지지 않는 곳이다.
아, 공이 별세하신지 237년이 되는 해에 비로소 사당을 세웠고, 영정이 북쪽으로 갔다가 87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서울의 도성 문을 나올 때에 조정에 있는 내외 자손 40여 명이 장막을 치고 문밖까지 전송하였고, 사당에 봉안할 때는 온 고을 부로(父老)와 자제 1백여 명이 목욕재계하고 경건히 맞았으며, 온 성 안 사람들이 모두 모여 구경하였으니, 실로 사문(斯文)의 성대한 행사였다.
훗날 나를 이어 고을을 다스리는 이가 어리석고 비루한 자가 세운 것이라 하여 소홀하게 여기지 않고 공의 사당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경을 다하고, 훌륭한 선비들이 즐거이 서원에 모여 공부하게 된다면, 반드시 회헌(晦軒)의 마음과 깊이 교감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문을 흥기시키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없지 않으리라.
『주세붕(周世鵬), 竹溪志 行錄後』
6. 문성공 영정 환안 기문 |
임진년(1592, 선조25) 초여름에 문성공 영정을 모처로 옮겼으니 왜적의 난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계사년(1593, 선조26) 9월 6일에 백운동 묘우에 되돌려 봉안하였으니 조금 평안하게 모시기 위해서였다. 문정공 ․ 문경공 두 분도 모두 배향하였다. 나는 기쁘면서도 슬퍼 긴 한숨을 쉰 지 오래 되었다.(중략)
공의 영정은 순흥부 시절에 향교에 모셔져 있다가 정축년(1457, 세조3) 사변에서울 대종가로 옮겨 모셨고, 가정 계묘년(1543, 중종38) 3월에 후손 안정(安珽)이 주서(注書)로 있을 때에 주세붕 군수가 사당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모시고 와서 풍기 고을 서쪽 정자에 임시로 모셨다가 8월 계미일에 사당 안에 봉안하였다.
만력 임진년에 이 난리를 만나 초암(草菴)으로 옮겨 모셨다가 다시 은선암(隱善菴) ․ '북천암(北川菴)으로 옮겨 모셨는데 이는 모두 소백산에 있는 암자이다.
그 뒤 지금에 되돌려 봉안하게 된 것이다.
아, 공께서 세상을 떠난 지 237년 만에 사당을 세웠고, 영정이 북쪽으로 옮겨진 지 87년 만에 고향으로 되돌아왔고, 또 50년을 지나 옮겨 모셨다가 1년 만에 되돌려 모셨다. 그 사이의 변천이 이토록 많은데도 지금 영정이 마치 살아계신 듯이 늠름하니, 세월이 없애지 못하고 병화(兵火)가 해치지 못하니 모두 천지신명의 뜻이리라. 원장 남치형(南致亨)이 나에게 제문을 지으라고 청하였는데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아울러 헌관 ․ 집사 ․ 유사의 성명을 기록하여 일생의 면목으로 삼는 바이다.
월일. 후손 희(憙)가 쓰다. [影幀還安記] 『안희(安憙), 雲院雜錄 ․ 竹溪先生文集 卷2』
7. 문성공 유상을 봉안할 때 발문 |
공의 유상이 옛날에 순흥부(順興府) 향교에 있었는데, 정축년(1457, 세조3)의 변고에 고을이 폐지되자 한양(漢陽)의 대종가(大宗家)에 이안(移安)되었다. 내가 공의 종손(宗孫) 전 주서 안정(安珽)의 집에서 한 번 배알할 수 있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근엄하고 가까이 대하여 보면 온화하여 실로 대인군자의 모습으로 마치 직접 말씀과 기침소리를 듣는 것 같아 늘 마음속으로 잊을 수 없었다. 계묘년(1543,중종38) 3월에 내가 사당[廟]를 세운다는 말을 듣고 주서가 영정을 모시고 남쪽으로 와서 고을 서쪽 정자에 봉안하였다가, 8월 계미일에 비로소 새 사당에 봉안하였다.
공의 옛집은 폐지된 순흥부(順興府) 성 남쪽에 있었는데, 부서진 기와와 무너진 담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새 사당은 성 북쪽에 있으니, 곧 숙수사(宿水寺) 옛터이다. 서로 바라보이는 것이 겨우 소가 울면 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인데, 공께서 소년 시절에 이곳에서 독서하였으니 더욱이 감회가 일지 않을 수 없다.
죽계(竹溪)가 그 왼쪽으로 돌아 흐르고 소백산(小白山)이 오른쪽에 솟아 있으니, 구름 ․ 산 ․ 언덕 ․ 물의 풍광이 정말 여산(廬山)에 뒤지지 않는 곳이다.
아, 공이 별세하신 지 237년이 되는 해에 비로소 사당을 세웠고, 영정이 북쪽으로 갔다가 87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서울의 도성 문을 나올 때에 조정에 있는 내외 자손 40여 명이 장막을 치고 문밖까지 전송하였고, 사당에 봉안할 때는 온 고을부로(父老)와 자제 1백여 명이 목욕재계하고 경건히 맞았으며, 온 성 안이 떠들썩하게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하였으니, 역시 사문의 일대 성대한 행사였다.
후세에 지금의 일을 계승하는 이가 실로 어리석고 비루한 자가 세운 것이라 하여 소홀하게 여기지 않고 일심(一心)으로 공의 사당에 공경을 다하고 훌륭한 선비들이 모두 즐거이 서원에서 공부하게 된다면, 반드시 회헌 (晦軒)의 마음과 깊이 교감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사문을 흥기시키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없지않으리라.
주세붕(周世鵬)이 삼가 쓰다.『주세붕(周世鵬), 竹溪志 行錄後』
8. 아들 우기의 문성공 안향 진상 찬문 |
지난 연우(延祐) 5년(1318, 충숙왕 5) 2월에 유지(宥旨)가 내려졌다. 그 조목에 의하면,
도첨의 중찬(都僉議中贊)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 안향(安珦)은 학교를 숭상하여 설치한 공이 있으니 공자 사당에 영정을 봉안하고 고향에서 제사를 올리라.
하여, 흥주수(興州守) 산랑(散郎) 최림(崔琳)이 임금의 유지에 따라 영정 한 벌을 그려 향교에 봉안하려 하였다. 당시 사자(嗣子)인 우기(于器)가 마침 조정의 부름을 받아 변방에 나가 있었는데, 최림이 이를 보내 보여주었다. 이에 향을 피우고 절한 뒤에 찬을 쓴다.
선친께서 예전에 유풍(儒風)을 진작하신 공으로 先君當日振儒風
영정을 그려 문묘에 봉안하라 명 하였네 上命圖形文廟中
한 폭의 진상(眞像) 고향에서 빛나고 一幅丹靑炤桑梓
사계절 제사 올려 큰 공에 보답하네. 四時籩豆答膚功
이해 가을 9월 일, 경상전라주도순무진변사 광정대부 검교평리 겸 판전의시사상호군
(慶尙全羅州道巡撫鎭邊使匡靖大夫檢校評理兼判典儀寺事上護軍)
안우기(安于器) 절하고 쓰다.
宣授高麗國儒學提擧 都僉議中贊 修文殿太學士贈諡文成公安珦眞越延祐五年二月。降宥旨。其目云。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安珦。有崇設學校之功。 亦於夫子廟庭圖形。致祭桑鄕。興州守散郞崔琳。依其目。摹寫一軀。將安之于鄕校。時。嗣子于器適承乏鎭邊。崔君送以示之。於是。焚香拜手。乃爲之贊曰。 先君當日振儒風。上命圖形文廟中。一幅丹靑炤桑梓。四時籩豆答膚功。是年秋九月日。慶尙全羅州道巡撫鎭邊使匡靖大夫檢校評理兼判典儀寺事上護軍。
安于器拜題。
9. 회헌선생 진상 후면에 씀 |
이 영정이 세월이 오래 된 탓으로 낡고 훼손되어, 현손 봉상소윤(奉常少尹) 지귀(知歸)가 전문 화가에게 보수하게 하여 고향 땅에 모셨다.
『안지귀(安知歸), 竹溪世稿․&追遠錄 卷1』
敬題先祖晦軒先生眞像軸後面 是幀歲遠殘缺。玄孫奉常少尹知歸倩善手改粧䌙。歸安桑鄕。
10. 죽옥 선조의 문성공 진상(眞像) 찬시에 삼가 차운함 |
문성공의 영정은 옛날에 원(元) 나라 사람이 그린 것이 있었다. 충숙왕이 무오년(1318, 충숙왕5)에 명을 내리기를, “안문성은 학교를 세운 공로가 있으니, 부자(夫子)의 사당에 아울러 영정을 그려 모시고 관향에서 제사를 모시게 하라.” 하였다. 이에 산랑(散郞) 최림(崔琳)이 그 명에 의거하여 영정 한 부를 모사(摸寫)하여 고을의 향교에 봉안하였다. 그 뒤 조선조 정축년(1457, 세조3) 사변에 고을이 폐지되어 서울 안씨대종가(大宗家)에 옮겨 봉안하였고, 현손 봉상소윤 지귀(知歸)가 그림을 잘 그리는 이에게 부탁하여 수리하였다.
중묘(中廟) 임인년(1542, 중종37)에 서원을 창건하고 사당을 세우게 되었고, 계묘년(1543, 중종38) 3월에 주손(冑孫) 주서(注書) 정(珽)이 영정을 모시고 영남으로 가기 위하여 도성을 나서는 날, 문성공의 내외손으로서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는 자 40여 명이 나와 장막을 쳐놓고 제사를 지내고 전송하니, 당시 사람들이 한 시대의 성대한 일로 일컬었다. 당시에 사당 건물이 다 완공되지 못하여 공관(公館)으로서 정결한 곳을 찾아 풍기군 서쪽 작은 정자에 임시로 봉안하였다. 8월 11일 계미일에 새로운 사당에 봉안하게 되어, 고을의 부로(父老), 사족(士族)의 자제, 서민으로서 준수한 자 등, 10세 이상의 사람들이 다 모여 경건히 맞이하였으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처럼 이어졌다. 희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낼 때 먼저 아동으로 하여금 「죽계사(竹溪詞)」 3장을 낭송하게 한 뒤 폐백을 올리고 제물을 올렸다. 그 다음에 「도동곡(道東曲)」 9장을 가지고 세 차례 헌작(獻酌)할 때 3장씩 나누어 노래하게 하였다.
문정공(文貞公)과 문경공(文敬公)을 함께 배향하고 봄가을 두 차례 제향하였다.
전조(前朝)에서부터 왕명으로 영정을 그리게 하였는데, 서원에 봉안된 것은 재차 모사된 것으로서 연도가 오래 되어 비단이 손상되었다. 이에 관찰사가 지방을 순행하다가 사당을 참배하면서 직접 살피고서 누차 우려하였다.
명묘(明廟) 무오년(1558, 명종13) 에 풍기군수 장문보(張文輔)가 예조판서 심통원(沈通源)에게 글을 올려 다시 모사하기를 청하였다. 원장 안구(安駒)가 상경하여 비단 등을 마련하고 비변사가 재상에게 고하여 도화사(圖畵司) 제조가 화원(畵員) 이불해(李不害)를 추천하였다. 그런데 그 화원이 마침 질병으로 먼 곳에 있으면서 올라오지 못하여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다. 그 이듬해 경상감사 이감(李戡)이 군수 박승임(朴承任)의 보고에 의거하여 조정에 요청하니 상이 윤허하여, 화원이 역마를 타고 내려왔다. 당시에 후손 좌의정 현(玹)과 찬성 심통원이 일을 주관하였고, 의정의 아우 상(瑺이 영천군수(榮川郡守)로 있으면서 함께 힘썼다. 기미년(1559, 명종14) 11월 을축일에 영정 모사를 다 마쳤다.
선조 임진년(1592, 선조25)에 난리를 피하여 소백산 초암사(草庵寺)에 옮겨 봉안하였고, 다시 은선암(隱善庵)으로 옮겼다가 그 이듬해 계사년(1593, 선조26) 9월6일 도로 사당에 봉안하였다. 그 뒤 원장 곽진(郭山晉)이 영정에 채색을 더 입혔다.
인묘(仁廟) 계유년(1633, 인조11)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을 추가하여 배향하였다. 당시에 사림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위판을 모시고 영정을 거두어 보관하였다. 효묘(孝廟) 기해년(1659, 효종10)에 후손 순원군(順原君) 응창(應昌)이 사당을 참배한 뒤 채색을 더 입히고 다시 단장하였으며, 다시 세 본을 모사하였다.
순묘(純廟) 임오년(1822, 순조22)에 참판 김희주(金熙周)가 원장이 되어 중국 화공을 불러 다시 그리게 하였고, 아울러 문선왕(文宣王) 영정과 여러 제자들의 소상(小像)을 그렸다. 이에 전후 옛날 본과 기미년에 처음으로 그린 본 한 두루마리 이불해(李不害)가 처음 그린 한 본이 잘 맞지 않아 다시 모사하였다. 등을 모두 상자에 넣어 보관하였다.
원 나라 사람이 그린 것에서 세 차례 전사(轉寫)되면서 여러 본이 생기게 되었는데, 12대손 상원군수(祥原郡守) 욱(頊)이 고을 남쪽 대룡산(大龍山)에 만지정(萬枝亭)을 짓고 한 본을 봉안하였다가 순묘 임오년에 만지정 곁에 영정각을 지어 봉안하였다. 다시 헌묘 병신년(1836, 헌종2)에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옮겨 봉안하였다가 무진년(1868, 고종5)에 서원이 철폐되면서 도로 만지정에 봉안하였다.
기해년(1659, 효종10)에 모사한 세 본 중, 한 본은 장단(長湍) 봉잠서원(鳳岑書院)에 봉안하였고, 한 본은 순원군의 가묘에 봉안하였다. 숙묘 병진년(1676, 숙종2)에 후손 진사 호(琥)가 순원군 가묘에 봉안되었던 것을 받들고 남쪽으로 내려가 곡성(谷城) 승법리(承法里)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봉안하고 봄가을 마지막 달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또 송도(松都) 한천서원(寒泉書院), 재령(載寧) 좌리영당(左里影堂), 춘천 가산영당(佳山影堂) 등에 다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안영호(安永鎬), 岌山文集 卷2』
11. 영정 보수 기록 『안상봉(安相鳳), 順興安氏續修追遠錄』 |
본원에 봉안되었던 영정은 문선왕(文宣王) 영정이 두 본, 한 본은 독신상(獨身像)이고 한 본은 70명의 제자들이 줄지어 시립(侍立)한 것이다. 회헌선생(晦軒先生) 영정 세 본, 한 본은 원나라 사람이 그린 것으로서 서울 대종가(大宗家) 묘우에 봉안되었던 것을 명종 계묘년 봄에 주손(冑&孫) 죽창공(竹窓公) 안정(安珽)이 본원에 옮겨 봉안하였다가 뒤에 후손 순원군(順原君) 안응창(安應昌)이 보수한 것이고, 한 본은 춘천(春川) 월곡사(月谷祠)가 훼철된 후 본원에 옮겨 봉안한 것이고, 한 본은 참판 갈천공(葛川公) 김희주(金熙周)가 동주(洞主)로 있을 때 모사한 것이다.
신재선생(愼齋先生) 영정이 세 본, 두 본은 구본(舊本)이고 한 본은 김참판이 모사한 것이다. 오리선생(梧里先生) 영정이 한 본, 미수선생(眉叟先生) 영정이 한 본이다. 합하여 모두 열 본의 영정이다.
지난 신해년(1911)에 본원이 불의의 변고를 당하여71 오직 선성(先聖)과 선자및 신재의 영정은 구본만 각 한 폭씩 보존되었는데, 그 중에서 우리 선조의 영정이 유독 훼손이 심하여 대단히 미안하였다. 본원 유사가 나[相鳳]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본원의 본손(本孫)으로서 전후로 서원 일을 주관한 사람이다. 선생의 화상에 훼손된 곳이 많다. 지난번 서울에서 전람회를 열었을 때 첨배(瞻拜)한 이들이 매우 많았고 이로부터 외국인들도 종종 와서 봉심하기를 청하고 있는데, 매번 펼치고 말기가 어려우니 속히 보수해야 되겠다.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은 사양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나는 의리상 감히 피하지 못하여 드디어 족조(族祖) 교원(敎元)씨와 더불어 모시고 함께 달성(達城)으로 갔으니, 이때가 바로 신해년 윤4월 16일이었다.
본군 군수 한희석(韓禧錫)과 도참(道叅과 한규복(韓圭復)이 때마침 함께 상의하여 화공과 표구사(表具師)를 추천하여 경건히 보수하여 수개월에 걸쳐 일을 마쳤다. 6월 초4일 강당 협실(夾室)에 도로 봉안하게 되었는데, 방안에 그을음이 잔뜩끼여 너무나 미안하였기에 방을 고쳐 마루로 만들었다.
병인년(1926) 가을에 다시 화공 엄주화(嚴柱華)를 불러와 공자 화상 전폭과 신재 영정을 보수하였다. 공자 화상은 새로이 길쭉한 감실을 설치하여 걸어 봉안하였고 신재 영정은 옛날 궤에 그대로 봉안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선자(先子)의 영정을 이번에 보수하면서 평상시 앉아 있는 자리처럼 앞에 유리로 막아 감실에 안치하여 사당 내 서쪽 벽에 봉안하였으니, 대개 첨배하는 데 편리하게 한 것이다. 이 일은 동주(洞主) 김동진(金東鎭)이 관리(管理) 김교림(金敎林)과 더불어 주선하였다.
정묘년(1927) 2월 16일 서원 말석 안상봉(安相鳳)이 삼가 기록하다.
『안상봉(安相鳳), 順興安氏續修追遠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