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추원단비(順興安氏追遠壇碑) 《성균관장 김경수(金敬洙)》
東邦의 大姓으로서 歷史가 오랜 된 名門顯閥을 꼽는다면 順興安氏가 으뜸으로 꼽힐 것이다.
高麗 神宗 때 興威衛保勝別將이며 神虎衛上護軍으로 追封된 諱 子美가 始祖가 된다. 墓所가 順興 小白山에 있었다고 하나, 表石이 없어 찾지 못하니 後孫들 가슴에 사무치는 恨을 품게 한다.
옛 宅地는 順興城 남쪽 數里 되는 坪里村 辰向에 있었으니, 晦軒先生께서 일찍이 벼루를 씻으시던 洗硯池가 그 아래에 있다. 仁祖 丁亥年 봄 十七代孫 順原君 應昌이 義城縣令으로 赴任하여 累代 祖上이 있는 貫鄕을 찾아 隣近에 사는 諸宗과 協議하여 孝宗 甲午에 上護軍公과 太師公의 歲祀壇을 築造하였으며, 孝宗 乙未年 봄에 高麗 先賢인 文成公 晦軒先生의 鄕閭碑를 세우니 鄕閭壇이라 稱하였다.
따라서 田土를 마련하여 나라의 大祭로 推仰하되 宋朝 儒賢의 禮를 본받아 每年 十月 초하루에 會祭하는 것으로 영원의 規則을 삼았다.
上護軍公이 三子를 生하니 長은 永儒로 高麗 神宗 四年 辛酉에 生하여 樞密院副使 上護軍으로 追封되고 墓는 順興 浮石面 甘谷里 智藏山 辛坐이다. 高麗 庚辰에 諱 孚를 生하니, 甲辰에 文科에 올라 官이 密直副使 版圖判書 太師門下侍中으로 追封되다. 太師公이 賢人을 啓導한 功이 있어 太中?M韋齋 兩賢과 더불어 아름다움이 千秋에 짝하였으며 墓는 順興에 있었다고 하나 失傳하니, 上護軍 壇에 從享하다. 高宗 癸卯에 太師公이 珦을 生하니 初諱는 裕이라. 先生은 젊어서부터 性理學을 좋아하여 元宗 庚申에 나이 十八歲로 文科에 及第, 己丑에 忠宣王을 따라 元나라에 가서 燕京에 留하여 朱子書를 베끼고 또 孔子와 朱子의 肖像을 본떠서 歸國하여 性理를 講究하고 精舍를 築造한 뒤 奉安하고 朝夕으로 우러러 拜謁 景慕함으로 해서 晦軒이라 號하다.
孔子와 朱子를 尊崇하야 道學을 일으키니 우뚝 東方道學의 祖가 되다. 官은 三重大匡 都僉議中贊 修文殿 太學士요 諡는 文成이며 忠肅王 己未에 文廟에 從祀하다. 中宗 壬寅에 文敏公 周世鵬先生이 書院을 順興 白雲洞에 創建하였고 明宗 乙酉에 文純公 退溪李先生이 白鹿洞故事에 依하여 朝廷에 奏請함으로써 紹修書院의 額과 經籍을 下賜받으니 우리나라의 書院은 이로부터 始作되었다.
晦軒先生이 諱 于器를 生하니, 號는 竹屋이요 文科에 올라 官이 匡靖大夫 檢校僉議贊成事 兼 判典儀寺事요 順平君 諡 文順이다. 文順公이 二子를 生하니, 추원단비 長은 諱 牧이니 號는 謙齋요 官이 通憲大夫 政堂文學進賢館大提學으로 封順興君 諡 文淑이다. 次는 휘 愼이니 右司議大夫 鹵簿都監判官이요, 墓失傳하여 隆熙 後에 첫壬戌 봄에 後孫 鍾悳?M奎鎔?M承弼 등 諸宗이 順興 坪里 마을 梧山에 壇을 設하였다. 順興君이 三子를 生하니, 長은 휘 元崇이니 文科에 올라 官이 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 大提學으로 封 順城君 諡 文惠요, 次는 휘 元衡이니 官이 金紫光祿大夫 政堂文學 壁上三韓三重大匡輔國門下侍中平章事요 佐命功臣으로 竹城君에 封하니, 諡는 文惠요, 次는 휘 元璘이니 文科에 올라 官이 政堂文學 檢校中樞府事로 耽津君에 封하니 諡는 文烈이다 판관공이 삼자를 生하니 長은 휘 勳이니 判官典校寺事요, 次는 휘 貞이니 禮賓尹이요, 次는 휘 景이니 文科에 올라 主簿同正郎將의 벼슬을 하니 곧 一派이다.
始祖公 次子는 휘 永麟이니 神騎別將 密直副使로 追封되다. 公이 諱 貞俊을 生하니 吏部侍郞으로 추봉되다. 公이 휘 成哲을 生하니 檢校軍器監에서 元宗 癸酉에 휘 文凱를 生하니 初諱는 鈞이요 號는 質齋니 文科에 올라 東韓保節盡忠無極功臣 匡靖大夫僉議參理 贊成事 藝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典理判書 領孝思觀事 三重大匡左政丞 封順興府院君으로 시는 文懿이다. 以上 四世 墓 失傳하여 隆熙 後 첫 戊戌年에 歲祀壇을 順興 石橋里 언덕에 築造 後孫 鍾? ? 在永 ? 載駿?M相鎬 등 여러 宗人들이 協勞하고 昌慶이 壇記를 짓고 郡守 昌烈이 文懿公 閭?M碑를 세우고 誌를 撰하다. 公이 五子를 生하니 長은 휘 千載니 中朗將이요, 次는 휘 千瑞니 通禮門祗候요, 次는 휘 千吉이니 領郎將이요, 次는 휘 千善이니 文科에 올라 官이 政堂文學 寶文閣大提學으로 封順城君 諡 良定이요, 墓 失傳하여 醴泉 白松洞 巾芝山에 祀壇을 設하다. 次는 千松이니 散員이다.
千瑞 公이 二子를 生하니 長은 휘 仁發이니 進士요, 次는 휘 原起니 戶曹典書이다. 良定公이 三子를 生하니 長은 휘 孫柱니 中郞將 文科 贊成으로 封 順成君 諡 景惠요 墓 失傳하여 良定公과 同壇 從享하다. 차는 휘 天鳳이니 禮部議郞이요, 次는 휘 天保니 官이 輔國崇祿大夫 左議政 領敦寧으로 시 昭懿니 곧 二派이다.
始祖公의 第三子는 永和니 典理正郞이다. 公이 二子를 生하니 長은 諱 得財요 戶長에서 戶部郞中으로 追封되다. 公이 諱 希?M를 生하니 判典客寺事이다. 위 三世의 墓 失傳하여 純祖 乙酉에 後孫 其命?M性老 등 諸公이 祀壇을 四賢井 南쪽 臺山에 設하니 곧 臺山壇이다. 判典客寺事公이 諱 碩을 生하니 忠烈王 八年에 文科에 올랐으되 隱德不仕하니 奉翊大夫密直提學으로 追封되고 세 아들과 함께 城東一里에서 同居하였다. 舊居하던 집 곁에 옛 우물이 있어 仁宗 乙巳에 文敏公 周世鵬先生이 四賢井碑를 세워 表徵하다. 提學公이 五子를 生하니 長은 諱 軒이니 判典客寺事요 次는 諱 軸이니 號 謹齋이다. 忠肅王 때 文科에 及第하고 甲子에는 元朝制科하여 勅授將仕郞 遼陽路盖州判官 本國 三重大匡僉議贊成事 興寧府院君 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로 諡 文貞이요, 次는 휘 輔니 文科에 올라 典法判書 藝文館大提學으로 諡 文敬이요 墓 失傳하여 隆熙 後 첫 壬午年에 赫中?L必中 등 諸宗이 協勞하여 臺山壇에 追設配享하고 同時에 歲祀壇碑를 세우다.
次는 諱 輯이니 文科에 올라 官이 輸忠輔理功臣 三重大匡寶文閣大提學 成均館祭酒요 封順興君이다. 墓 失傳하여 純祖 乙酉에 臺山壇에 同享하다. 次는 諱 乙壽니 中郞將이다. 判典客寺事 軒이 二子를 生하니 長은 諱 祥鳳이니 都事요, 次는 諱 祥殷이니 摠郞이다. 文貞公이 二子를 生하니 長은 諱 宗基니 寶馬陪行首別將이다. 次는 諱 宗源이니 號는 雙淸堂이요. 文科에 올라 官이 密直提學 領三司事 右文館大提學輔國崇祿大夫 判門下府事 集賢殿太學士요. 興寧府院君 諡 文簡이다. 祭酒公이 諱 永孚를 生하니 進賢館提學이다. 中郞將公이 諱 處良을 生하시다. 始祖公 三子이신 典理正郞公의 次子는 得仁이니 檢校大將軍이다. 檢校公이 諱 時弼을 生하니 國學司成이다. 公이 諱 世文을 生하니 直長同正이다. 公이 諱 瑞를 生하니 進士요, 公이 諱 周程을 生하니 通訓大夫禮賓正으로 곧 三派이다.
初祖이신 上護軍公께서 德業을 닦아 餘慶을 기르심으로써 道學, 文章, 忠孝, 節義가 뒤를 서로 이어서 代代로 世上에 貢獻한 美學과 門閥의 隆盛함은 宋나라 河南의 程氏 新安의 朱氏와 더불어 함께 꼽을 만하다. 科擧에 登第한 賢人君子를 要略記錄하면 文科 180분 司馬 32분 忠臣 55분 封君 또는 諡號를 下賜받은 분이 30여 분이요, 文廟配享과 書院祠享이 60餘 位이며, 抗日鬪爭에 이르러서는 愛國志士로 重根 義士와 昌浩 島山公 外 數百 人이다.
追遠齋는 옛 그대로 石橋里 二四六番地에 있었던 바, 順原君이 建立한 것으로 草屋의 약간의 架木이 歲月이 오래 됨에 따라 頹?L하고 規模와 制度가 素樸하고 狹小함으로 檀紀 四二五一年 무오에 後孫 宗昱 外 여러 宗員들이 協力하여 鄕閭壇을 修築하고 歲祀壇碑를 세우며 또 追遠齋 草家를 石橋里 二二九番地에 瓦家로 移建하여 庚申年 봄에 落成을 고했다. 戊戌年 가을追遠齋增築할 것을 公議하고 後孫 寅植 外 137人이 聯名으로 八道同宗에 通告하여 財物을 모으고 工人을 불러 庚子年에 講堂 및 東齋와 附屬建物을 增築하니, 마을의 景觀이 改新되고 累代 祖上이 있는 鄕土가 光彩를 더하였다.
壬寅年 가을에 宗議가 鄕閭壇을 齋室 뒤 181番地 田으로 移設키로 하여 癸卯年 봄에 起工七月十七日에 安石하니 山坡壇은 同時 完成하고 臺山 梧山의 二壇은 三年이 지난 丙午年 가을에 移安하니 承奎 外 諸宗이 勞苦를 들이어 竣工하였다. 其後 乙丑年 가을 順興 紹修書院 大講堂에서 開催한 全國花樹會 總會 때에 여러 宗人들이 모두 論議하기를 追遠齋 뒤는 祀壇의 制度가 樸狹하여 激增하는 參祀者를 收容할 수 없어 祭祀드리기가 지극히 어려우며 配列한 秩序가 어지럽고 周圍環境의 汚損으로 不潔하니 聖域地로 옮겨 奉安하자는 建議를 議決하고 一 ? 二 ? 三派 宗會와 合議하여 順興安氏始祖祀壇 移轉重建事業推進委員會를 構成하고 規約 任員 事業計劃을 完成하여 全國 諸宗에게 通告하니 報本하는 誠力이 답지하였다.
丙午年 봄 飛鳳山 十三町步를 買入하고 丁卯 二月八日 基址를 靈山의 陽地바른 吉局에서 열게 되니 터전의 規模가 整然하여 위는 始祖上護軍公 壇이 되고 아래에 中央으로부터 左는 太師公位 壇이니 前日의 鄕閭壇이요 우는 判官公位 壇이니 前日의 梧山壇이며 西는 神騎別將公位 外 三位는 곧 前日의 山坡壇이며 右東은 典理正郞公 外 四位니 前日의 臺山壇이다. 前例대로 施工하여 戊辰年 가을 大工事를 竣工하니 全體를 일러 順興安氏追遠壇이라 이름하다.
아아! 아름답고 盛大하여라. 많고 많은 훌륭한 後裔들이 合心協力하여 邁進하였음이로다. 만일 追遠報本의 熱誠이 없었다면 어찌 이 大事業을 成就할 수 있었으리오. 後孫 京模 등 諸彦이 世乘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銘을 지어줄 것을 請하기에 내 後學으로 아는 것이 어리다하여 辭讓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마침내 분수에 넘침을 헤아리지 못하고 삼가 살펴보면서 차례대로 삼가 撰하고 銘으로서 이으니, 銘하여 이르노니
順興 땅에 定着하여 터전을 잡고 향기로움을 東方에 뿌렸도다. 德業을 심고 餘慶을 기르셨기에 三兄弟 모두 훌륭하게 되셨네. 太師公은 賢人을 啓導하신 功이 있어 韋齋와 함께 짝이 되도다. 하늘이 晦軒先生을 내시니 공자와 주자를 존숭하도다. 지난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을 열어줌으로 道學의 祖가 되셨네. 朝廷에서 높이 받들어 聖?@에 올려 配享하도다. 薰陶의 敎化가 미쳐서 대대로 碩德이 輩出되어 임금을 위해 몸을 바치고 百姓에게 惠澤을 입혀서 家門과 나라를 振揚케 하였네. 世代가 오래되어 陵谷도 變하니 아무리 찾아도 失傳된 墓는 찾을 길 없었네. 단을 세우고 祭祀받든 지 三百年이로다. 飛鳳山 明堂 언덕에 옮겨 築城奉安하니 큰 福을 싣고서 거듭돌아옴이며 여러 代 쌓아온 아름다운 德化 더욱더 드날리니 높이는 저 小白山과 같이하고 그 영원함은 竹溪와 함께 하리도다.
檀紀 四千三百二十三年 庚午春(1990)
後學 成均館長 光山 金敬洙 謹撰
大韓民國美術大展書藝部審査委員長 友竹 楊鎭尼 謹書
順興安氏全國花樹會 始祖祀壇 移轉建立事業推進委員會 建立
순흥안씨 선조의 제단/순흥안씨대감
1. 단소(壇所)와 추원재(追遠齋)
순흥은 우리 순흥안씨의 발상지로 830여 년의 씨족 역사를 알려주는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조선 세조 3년(1457)에 있었던 소위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에서 단종복위 사건으로 인하여, 이곳을 관향으로 약 260년 간 살아왔던 순흥안씨들은 멸족의 피화와 이향(離鄕)으로 말미암아, 시조공의 묘소를 위시하여 상대 조상들의 산소는 모두 실묘(失墓)하고 말았다.
그러나 순흥에서 멀리 떨어진 영주시 부석면 지장산록의 추밀원부사공(樞密院副使公) 영유(永儒)의 묘소, 사촌공 덕린(德麟1563~1609)에 의하여 찾게 된 영주시 단산면 서창의 제학공 휘 석(碩)의 묘소와, 문정공 휘 축(軸)의 배위인 감천군부인 문씨 묘소, 그리고 경기도 임진현 서국동에서 봉화 수민방으로 이장한 문간공 휘 종원(宗源) 묘소 등 4기는 실묘(實墓)로서 오늘날까지 잘 보존관리되고 있다.
특히 묘소는 추원보본(追遠報本)의 근원으로 조상을 섬기며 음덕(蔭德)을 기리고자 하는 자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성소(聖所)이다. 그리고 단소(壇所)는 묘소의 실전으로 묘를 가름하여 해당 조상을 모시고 추모하며 세사(歲祀)를 거행하기 위하여 축조한 단비 및 상석제단을 지칭하는 것이다.
또한 추원재(追遠齋)는 조상의 은덕(恩德)에 대한 추원보본의 도리에서 조상의 유택인 묘소 또는 단소 보존관리 및 세사봉행 등 종사업무 전반을 추진하기 위해 지은 재사(齋舍)를 말한다.
순흥안씨의 묘소 재사로는 좌의정 문간공 안현(安玹)의 동생인 상(?이 1558년에 영천군수로 부임하여 외손들인 이개(李?. 이극검(李克儉). 문명개(文命凱). 권일(權鎰) 등의 협력을 받아 추밀공 묘소 아래에 영모암(永慕庵)을 지은 것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묘소 재사의 효시가 된다.
그리고 효종 5년(1654)에 17대손 의성현령이던 응창공(應昌公)이 석교리 203번지에 향려단(鄕閭壇)을 세우고, 단제봉행을 위하여 석교리 246번지에 초가 삼간을 세워 ‘추원재’라 명명한 것이 그 두 번째에 해당된다.
1917년 12월에 기존의 추원재에서 이전 확장을 결의하고, 1918년 9월에 종욱(宗昱). 상봉(相鳳). 택호(宅鎬). 교덕(敎悳) 등이 주관하여 향려단을 중수하고, 추원재를 석교리 229번지 구비단(舊碑壇)으로 이건한 것이 그 세 번째이다.
1958년 10월 세사당회(歲祀堂會)에서 인식(寅植) 등이 추원재 증설을 결의하고, 1960년 4월에 강당 및 동재를 증축하였다. 다시 1962년 10월의 세사당회에서 향려단을 추원재 뒤 181번지 이설키로 결의한 후, 1963년 7월에 향려단과 산파단(山坡壇)을 구 추원재 비단으로 이안 설치하였다.
그리고 문성공 회헌 향려비(鄕閭碑)와 문의공(文懿公 質齋 安先生) 여항비(閭巷碑)도 함께 이곳으로 이설하였다. 또 1966년 가을에 대산단(臺山壇) 및 오산단(梧山壇)을 마지막으로 이곳으로 이설 합단하였다.
2. 단소의 개요와 연혁
(1) 향려단(鄕閭壇 1파)
1647년 봄에 17대손(參判公 9世) 순원군(順原君 應昌)이 일찍 의성현령에 도임한 후, 영모암 묘소와 소수서원을 참배하고 평리촌의 세연지(洗硯池)와 사현정(四賢井) 등을 돌아본 뒤, 시조공의 세사가 단절되고 유적이 마멸되어 없어져 가는것을 보고 깊은 회한을 느꼈다.
순원군 응창공은 1634년(仁祖12)에 송경(松京)의 양온동(良?洞)에 허목(許穆)의 비명(碑銘)으로 회헌선생의 유기비(遺基碑)를 세웠고, 1654년 (효종 5)에 시조공과 태사공의 제단을 평리촌 203번지에 축조하고 비단을 세워 향려단이라 이름하고, 매년 陰 10월 초1일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우리 안씨의 추원단설단의 시작이었다.
또 1655년에 문성공(文成公) 회헌선생(晦軒先生) 향려비 및 비각을 세웠으며 선산부사 때 지은 시조공 「관향유지사단기(貫鄕遺址祀壇記)」가 있다. 이 향려비는 1963년에 구 비단으로 옮기고, 향려단 옛터라는 간단한 표석을 세웠는데, 1990년에 향려단유허비(鄕閭壇遺墟碑)를 다시 세워 보존관리하고 있다. 향려단비는 1988年 읍내리 413번지 지금의 새 추원단으로 이설하였다가 2010년 문성공 유적지를 원래의 위치에 조성하면서 향려비를 당초의 위치로 옮겼다.
[향려단비문]
高麗先賢文成公安先生鄕閭碑
(2) 산파단(山坡壇 2파)
1858년(철종 9)에 2파 후손 종묵, 재영, 재준, 기경 등이 석교리 516번지 산록에 2파조 휘 영린(永麟)을 비롯하여, 휘 정준(貞俊), 휘 성철(成哲), 문의공 휘 문개(文凱) 4위의 단소를 세우고 세사를 올렸다. 그리고 질재선생 여항비(質齋先生閭巷碑)도 세웠다. 1963년 구비단에 이설합단하고, 산파단 옛터라는 표석을 세웠으며, 1992년 10월에 장호, 유호 등에 의해 다시 산파단유허비를 세웠다. 새 추원재로1988년 이설하였다.
[산파단비 山坡壇碑]
1位: 高麗神騎別將追封密直副使安公諱永麟
(고려신기별장추봉밀직부사안공휘영린)
配 郡夫人(배 군부인) ?歲祀壇(부 세사단)
2位: 高麗追封吏部侍郞安公諱貞俊(고려추봉이부시랑안공휘정준)
配 夫人 (배 부인) ?歲祀壇(부 세사단)
3位: 高麗檢校軍器監追封密直副使上護軍安公諱成哲
(고려검교군기감추봉밀직부사상호군안공휘성철)
配 順政郡夫人竹山安氏 (배 순정군부인 죽산안씨) ?歲祀壇(부 세사단)
4位: 高麗左政丞藝文館大提學順興府院君文懿公諱文凱
(고려좌정승예문관대제학순흥부원군문의공휘문개)
配 福興大夫人 徐氏(배 복흥대부인 서씨) ?歲祀壇(부 세사단)
(3) 대산단(臺山壇 3파)
1825년 (순조25)에 후손 기명(基命), 성노(性老) 등이 주관하여 순흥면 읍내리 84번지 사현정 남쪽 대산에 제단을 세우고, 휘 영화, 휘 득재, 휘 희서, 문경공 휘 보, 휘 집을 모시고 세사하였다. 단 보(輔)公은 1858년에 혁중(赫中) 필중(必中)등에 의하여 추설되었다. 1966年 가을에 재 뒤의 구비단(舊碑壇)으로 옮겼고, 그 자리에는 1985년 8월에 옛 비 8기를 복원하고 대산단유허비를 세웠다. 1988년 지금의 새 추원단(追遠壇)으로 이설하다.
[대산단비 臺山壇碑]
1位: 高麗追封校書郞安公諱永和
(고려추봉교서랑안공휘영화)
配 夫人 ?歲祀壇 (배 부인 부 세사단)
2位: 高麗戶長追封戶部郞中安公諱得財
(고려호장추봉호부랑중안공휘득재)
配 夫人 ?歲祀壇 (배 부인 부 세사단)
3위: 高麗戶長追封判典客寺事安公諱希?
(고려호장추봉판전객시사안공휘희서)
配 夫人 ?歲祀壇 (배 부인 부 세사단)
4位: 高麗典法判書藝文館大提學諡文敬公安先生諱輔
(고려전법판사예문관대제학시문경공안선생휘보)
5位: 高麗三重大匡成均館祭酒寶文閣大提學順興君安公諱輯
(고려삼중대광성균관좨주보문각대제학순흥군안공휘집)
配 郡夫人 ?歲祀壇(배 군부인 부 세사단)
(4) 오산단(梧山壇 1파)
1922년에 후손 종덕(鍾悳), 규용(奎鎔), 승필(承弼)등이 주관하여 석교리 302번지의 1에 제단을 만들어 판관공(判官公) 휘 신(愼)공을 모시고 세사하였다. 1963년 구비단에 합단하고, 오산단터라는 표석을 세웠으며, 1991年에 맹호(孟鎬), 규찬(圭燦), 승갑(承甲) 등에 의하여 다시 오산단 유허비(梧山壇遺墟碑)를 세웠다. 새추원단(追遠壇)으로 1988년 이설합단하였다.
高麗右司議大夫鹵簿都監判官順興安公諱愼
(고려우사의대부노부도감판관 순흥안공 휘 신)
配 郡夫人 淸州韓氏 歲祀壇(배 군부인 청주한씨세사단)
(5) 구 추원단
1962년에 1??파의 종의에 따라 순흥면 석교리 181번지에 1963년 7월에 향려단과 산파단을, 1966년 가을에 대산단 세사를 함께 봉행하게 되었다.
3. 추원단 이전 성역화 사업
(1) 이전 배경과 추진위원회 발족
순흥은 우리 순흥안씨(順興安氏)의 발상지이고, 순흥안씨추원단(順興安氏追遠壇)은 우리 선조들의 영(靈)이 잠자고 계시는 성지이다. 50만 우리 후손이 건재하는 안문의 관향지임에도 어려웠던 역사적 사실만으로 유적의 보존관리가 이루어 지지 않아 멸실된 것을 어찌 돌이킬 수 있으랴만, 추원재며 사단 하나를 제대로 가꾸지 못하고 성역화하지 못하고 있었음은 자손된 도리가 아니며 부끄럽기 그지없다는 반성의 소리가 높았다. 소수서원(紹修書院)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시조사단(始祖祀壇)은 이에 비하여 너무나 초라할 뿐 아니라, 단소가 협소하여 세사 때는 해마다 늘어나는 참사자들로 설자리마저 없을 뿐 아니라, 특히 단소가 동네 한 가운데 위치하여 정말 신성해야 할 곳이 축사의 악취며 진입로의 협소 등 환경이 불결하여 후손으로서의 면목이 없었다.
그리하여 관향지를 처음 찾는 종친이나 타문에서 찾는 인사들은 참배 후에는 실망하고 돌아서는 형편에 있었으니, 우리나라 유가(儒家)의 종가(宗家)로서의 체면과 후손으로서의 자책감은 물론이고, 자손들 교육을 위해서도 우리 세대가 기필코 시조사단을 이전해서 성역화하지 않으면 아니 될 역사적 사명이 부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1985년 9월 19일 중앙화수회의 이사회 결의에 따라 동년 10월7일 ‘순흥안씨 시조사단 이전중건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하였으며, 10월 14일 현판식을 가졌다. 동년 11월 11일 소수서원 강당에서 개최한 화수회 정기총회에 보고되어 만장일치의 결의로 이 사업를 거족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2) 사업계획 개요와 추진 경과
처음 사업계획은 추원단을 소수서원과 쌍벽이 될 수 있도록 웅대하게 축조해서 시조사단을 위시하여 선조사단 12위를 세우고, 안씨의 역사비[追遠壇碑], 기념관인 현조각, 숭모전, 관리사 및 공적비 등 예산 7억 원으로 확정하고 성금을 모금하던 중, 일부 종친들의 반대통문(反對通文)이 전국에 산포되는 등 격렬한 방해 때문에 4억 원으로 모금규모를 축소하고 사업계획을 재조정하게 되었다.
그 주된 반대 이유는 “현 단소는 선조님들의 고택지이며 350여 년의 유서지로 역사적 명소인데 그 곳을 성역화하지 않고 왜 옮기려하는가” 였다. 그러나 이 자리는 1918년에 매입한 땅이고, 현 단소는 1962년에 세사편의를 위하여 1. 2. 3파의 종의에 따라 네 단소를 합친 곳이니 역사적인 명소는 아니었다.
▣ 부지 선정
1986년 2월 2일 1??파의 각 회장과 재찬(在燦)종손 및 화수회장단 등 많은 뜻있는 종원들이 순흥에 모여 후보지인 비봉산을 답사하게 되었는데, 적당한 곳이 없다는 의견에 따라 후보지 선정을 9인위원회에 위임키로 결의하였다.
동년 3월 9일과 22일 답사 끝에 순흥의 진산인 비봉산(飛鳳山) 남쪽 일대를 매입키로 결의함에 따라, 순흥면 읍내리 산 21-1, 409, 411-1, 413-1번지 등 4필지 약 43,000평을 매입하고, 동년 6월 19일 자로 화수회 중앙회장 명의로 등기하였다. 또 추원단 앞 과수원 2,022평을 매입하여 뒷날 종사에 대비토록 하였다.
▣ 새 추원단의 설단 축조
이미 확정된 43,000여 평의 부지 위에 1987년 2월 8일 공사를 착공하여 최상단에는 시조 상호군공 단(始祖 上護軍公 壇)으로 정하고, 중단의 중심자리에서 좌로 태사공위가 되니 전 향려단이고, 우는 판관공 위이니 지난날의 오산단이다. 중단의 서편은 신기별장공위(神騎別將公位) 외 3위는 전날의 산파단이고, 동편은 3파 교서랑공(校書郞公) 위 외 4위는 전일의 대산단이다.
아래 넓은 잔디광장은 참사 종원 및 일반 참례객의 객석으로 1988년 10월에 준공하였고, 맨 아래는 1996년에 추원재와 1999년에 관리사, 2001년에 향려비각(鄕閭碑閣)을 세우고, 조경 및 부대시설을 완비함으로써 추원단성역화사업(追遠壇聖域化事業)을 완료하게 되었다.
▣ 비봉산 추원단은 순흥안씨 발상지요 성지
비봉산(飛鳳山)은 봉황이 나는 형상을 가진 소백산국립공원 중에서도 가장 이름 있는 명산으로서, 태백산(太白山) 높은 준령으로부터 굳세게 내려 뻗은 순흥의 주용(主龍)인 소백산 줄기에 병풍처럼 드리워진 산록(山麓) 남향의 좌우로는 청룡백호(靑龍白虎)가 우뚝하며, 학가산(鶴駕山) ? 문필봉(文筆峰)은 화풍완양(和風暖陽)하고, 그 앞에는 일찍이 목은 이색(牧隱 李穡)께서
“순흥안씨는 대대로 죽계(竹溪)에 사는데 죽계 근원은 소백산에서 나온다. 산이 높고 물길이 긴 것처럼 안씨들은 무궁히 번창할 것이다.”라고 한 그 죽계가 감싸 흐르며, 광활한 들녘 너머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크고 작은 군봉(群峰)들이 펼쳐지니 과연 순흥의 명당이요, 그 빼어난 풍관이 수려함에 우선 감탄치 않을 수 없다.
단소 바로 앞에는 일찍 회헌선조(晦軒先祖)께서 세거하시던 고택지(古宅址) ‘안터’가 있고, 그 옆에는 어렸을 때 공부하시면서 벼루를 씻던 세연지(洗硯池)가 있으니, 바로 이곳이 우리 순흥안문의 발상지요, 성지로서 추원단과 함께 영원히 보존관리 되어야 할 우리들의 성역으로서 자손들의 관향지 순례행사가 연중 끊임없이이어지고 있다.
▣ 새 추원단(追遠壇)에서 제향(祭享)
이 추원단 공사는 반대하는 종친도 많이 있었지만 1989년 세사 때는 2,000여 명의 종원들이 화합하여 종손재찬(在燦)씨가 초헌관(初獻官)이 되고 모든 종원들이 한 마음이 되어 봉제(奉祭)함으로써 숭조돈목(崇祖敦睦)과 종원단결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0年 봄에는 순흥안씨 추원단비(順興安氏 追遠壇碑)와 그간 성금 내 주고 사업추진에 공로가 많은 종원들에 대한 공로비를 세움으로써 이번 사업은 일단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는 우리 순흥안문의 쾌거로 훌륭한 선조제현의 위훈대덕(偉勳大德)을 추모(追慕)하고, 유훈전지(遺訓傳志)의 계승발전은 물론 추원지성(追遠之誠)을 마음 깊이 굳게 다짐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 추원단은 사적지(史蹟地)이며 유물(遺物) 순흥안씨추원단(順興安氏追遠壇)은 순흥안씨의 도선산(都先山)이며 동국유가(東國儒家)의 종가 집 본산이다. 이 추원단은 순원군 안응창(安應昌) 공이 향려단을 세운 지 350 년만의 대종사로서 소수서원과 쌍벽이 되었고, 순흥안씨추원단비는 회헌(晦軒) 향려비에 버금하는 우리 안문의 역사적인 기념비요 기적물(紀蹟物)이 되었다.
제단 및 단비 원석(原石)은 모두 남포오석(藍浦烏石)으로 그 재질이 우수하고, 높이 12척의 웅장한 비석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몇 개 없는 큰 비석이다.
비문은 유학자인 삼취당(三翠堂) 안용호(安龍鎬) 선생께서 한문으로 초고하고, 성균관장인 김경수(金敬洙)선생에게 드려 비문을 찬(撰) 받았는데, 3,700여 자로 되었다. 글씨는 서예한문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국전 초대작가인 우죽 양진니(友竹 楊鎭尼) 선생이 썼다.
그 동안 옛 추원재단소에 있던 문성공 회헌 안선생향려비(文成公 晦軒安先生鄕閭碑)는 고택 유적지 복원장소로 이전하였고 문의공 질재선생 여항비(文懿公 質齋先生 閭巷碑)는 새 추원단으로 옮겨 왔으나 2010년 문성공 향려비는 원래의 위치에 문성공 유적지를 조성하면서 당초의 위치로 옮기고, 영홍(永鴻), 용덕(鎔德), 경옥(坰玉) 등 후손이 문의공 여향비를 향려비각으로 옮기며, 여항비각으로 현판하였다.
순흥안씨 추원단 건설기옥 [비봉산
추원단 건설기록]
▣ 1958년 4개 단소(향려단, 오산단, 산파단, 대산단)를 석교리 181번지에 합단결의
- 1962년 이설완료, 추원재 증축중건 동서재실 보수, 수십 명 참사수용 가능
▣ 1970년대 축사가 생기고 학교와 마을이 들어서며 환경이 불결 협소하고 교통이 좋아져 수백명의 참사로 교통혼잡, 수용부족, 건물노후화
▣ 1983년 10월16일 순흥안씨전국화수회 창립총회(서교호텔), 이후 지방조직 결성 추진
▣ 1985년 1월 16일 중앙회장단 회의개최
- 안경모회장, 안호상고문, 안춘생 1파회장, 안영호 2파회장, 안동준 3파회장, 안갑준 상임부회장, 안원종고문 및 전국 시도회장 등 60여명 참석
- 안규찬 경북화수회조직위원장의 세사단건립 필요성제기, 관향지 초청제안
▣ 1985년 2월3일 안갑준상임부회장 관향지 방문
- 전국화수회 조직결성 독려 차 전국지역 순회 방문 중 안규찬회장과 회동
- 맹호, 승원, 승하, 상규, 길자, 욱 등 제종원이 동행
- 안경상 대구지검 검사장의 지원으로 이룩된 소수서원 앞 죽계천 복원사업 답사
- 시조사단 단소의 열악한 주변환경을 돌아보며 심방하는 후손의 실망감 공감
- 숭조보본의 사업으로 시조사단 성역화 이전을 소수서원과 상응하는 규모로 추진건의
▣ 1985년 3월27일 안규찬 경북회장, 쌍용중공업 안천학사장 방문 시조세사단 협의
- 전국화수회조직과 함께 성역화사업 추진 결의(상규, 인호, 진락 동행)
- 충남도지사 안응모지사 면담 적극지원 약속
▣ 1985년 5월11일 중앙회 임시회의, (국회의원 당선축하 모임) 세사단 중건 재건의
▣ 1985년 6월9일 관향지순례단 현지방문
- 서울 종친 52명, 대구 경북 각시군구회장 및 임원 49명 참석, 관향지 종친 30여명 등 130여명이 구 추원재 석교리에서 성역화사업 논의
▣ 1985년 7월20일 의왕시 안자묘에서 1파 종친회 정기총회 개최
- 안춘생 회장, 부회장에 정모, 응모, 천학, 경모, 규찬을 추대하고 추원단성역화 추진결의
▣ 1985년 9월19일 중앙화수회 1차 이사회 개최(서울 을지로 5가 계산빌딩)
- 순흥안씨 시조사단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 구성결의 채택(위원장 안천학추대)
▣ 1985년 9월21일~10월25일
- 안천학위원장 3천만원 출연 약속
- 안대찬부장검사를 상임부위원장, 순흥현지사업담당 안상영, 안규찬부위원장 위촉
- 운영규칙, 위원구성 완료, 현판 현수(10/14)
- 세부 사업추진 심의, 전국종원 안내문 배부
- 부지선정과 매입 건은 규찬부위원장에게 일임결의
▣ 1985년 10월31일 순흥안씨 경북도 화수회 창립총회, 시조사단추진결의
- 경북도회장 주관으로 숭조목족 자연석비 건수결의
▣ 1985년 12월7일~1985년 12월 10일
- 유적지보존회라는 종손명의를 빌린 단체의 반대통문에 대한 대책협의
- 유적연혁과 고증에 대한 기록 등으로 해명 수습추진
- 7인 대표(규찬, 승하, 맹호, 길좌, 효원, 승원, 욱)를 구성 순흥 전역의 후보지 답사
- 후보지(7곳): 소수서원 내죽리, 대산단 뒤, 석교리 동편, 송학산 일대, 비봉산 구릉지, 풍기방향 산야 등
- 비봉산일대가 도로변이고 산지형세가 좋으며 매입이 용이하여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는데 의견일치
- 영풍군청을 방문 부지매입과 이용에 관한 제반사항 협의
▣ 1985년 12월24일~1986년 1월 9일
- 각 시도회장회의, 전국종친 홍보방안, 향사참석 동원방안 채택
- 소수서원 소유 비봉산 매입방안 보고 및 추진지시(안경모회장)
- 순흥유림과 소수서원재산관리위원회 접촉, 협조요망
- 사업부지 답사보고서 작성 상경설명
▣ 1986년 2월2일 중앙회 임원 현지 답사
- 원종고문(동진산업회장), 두영 삼천리건설회장, 경모 중앙회회장, 동준3파회장, 춘생1파회장, 영호 2파회장, 갑준부회장, 병익사무국장, 무열, 맹호, 한, 상규, 진락, 규찬, 각파 종손, 치섭 등 30여명이 후보지 4곳을 방문하고9인위원회를 선임, 전권행사키로 함
- 9인위원(경모, 원종, 천학, 춘생, 영호, 동준, 인호, 규찬, 진락) 선임
- 1군사령관(안필준대장) 관사에서 성대한 만찬과 회의, 비봉산 후보지 만장일치 결의
▣? 1986년 2월7일 ?2월8일 매수협의 및 계약체결
- 2월 초부터 유림대표를 수십차례 만나 설득하여 3월17일 합의서(가계약서) 약정
- 3/22 종손 재찬명의의 유적보존위원회가 전국종친에게 반대통문 발송
- 3/22 9인위원회 개최 후보지(읍내리 산 21?번지 외) 매입결의
- 3/29 소수서원 비봉산매도 결의
- 4/8 매매계약 체결(순흥면 읍내리 산 21? 임야 137,435m 외 5필지 3천8백만원)
- 6/19 시조사단 이전용 부지매입 토지소유권 이전등기 완료(등기명의 순흥안씨전국화수회중앙회 등기 제 7970호)
▣ 1986년 10월14일 상임이사회 개최 8개항 채택
- 중건사업 적극 추진,성금모금 전개, 종친간 화목단결, 부지조성공사 착수
▣? 1986년 10월?2월 부지 각종 인허가 추진
- 보전임지 전용허가, 유연고 묘지 이전, 산림훼손 허가, 형질변경 등
▣ 1987년 2월8일 이전지 부지 개기 고유기공식
- 회장(경모) 인사, 경과보고(규찬), 고유행사(토지지신, 산신) 등
▣ 1987년 4월22일 성균관장, 한국전례원장에게 중건사업 질의회시
▣ 1986년 2월?987년 8월 부지조성 공사
- 장마와 토사유출 등 집중폭우 피해(1987,7/15~16) 복구
▣ 1987년 11월2일 상임이사회 개최
- 사업추진 보고, 성금입금(2,754명 179,529,000원) 보고
▣ 1988년 1월30일 중앙화수회 신년인사교례회 개최
- 단소부지기반공사 완료보고 및 세사단 설단계획 보고 승인
▣ 1988년 2월?988년 8월시조사단 공사
- 시조사단 및 각 세사단 위비 표기방식(신주위패방식) 채택
- 단소배열 합의(상위 시조단, 하단 중앙 태사공과 판관공, 좌에 산파단, 우에 대산단)
- 비문작성(한학 대원로 삼취당 안용호대부), 국한문 혼용 및 축조심의 10여 회
- 비문축조심의 중앙심의회의를 거치고 성균관 자문과 성균관장 찬문 결정
- 비명 순흥안씨추원단비로 정함, 비신 높이 12척 이상 대비
- 석물 발주 및 제작
- 단소추원단 앞 과수원2,022평 3,300만원 추가매입(5/31등기)
- 읍내리 411?외 3필지 과수원 2,046평 32,341,000원 추가매입
▣ 1988년 9월27일 중앙회회장단회의 개최
- 경모회장, 춘생, 영호, 동준, 응모, 갑준, 천학, 원옥, 이준, 은호, 규찬, 승하, 승로, 맹호, 광식, 상보, 종성
- 추원단비문안 심의, 비문각자위치(좌고우비), 선조비단배열 확정
▣ 1988년 11월9일 비봉산 시조사단에서 첫 제향 및 이전 고유제 거행
- 11월8일 구추원재에서 천단 고유제 거행
※ 추원재 재실은 1992년 6월12일 추진위원회(위원장: 안응모, 부위원장: 천학, 종만, 병주)구성 후
1996년 11월 10일 준공함 (공사비: 242,699,100원)
추원단 전사청(관리사)는 1999년 5월30일 준공
4. 추원재(追遠齋)
1647년(인조 25) 봄에 18세조 순원군(順原君) 안응창(安應昌)공이 의성현령으로 부임하여 선조의 옛 터전을 찾으니, 타인의 경작지 등으로 황폐화 되었기에 탄식 끝에 향려단(鄕閭壇)과 추원재(追遠齋)를 만들기로 결심하는데서 출발하였다.
▣ 1655년 단재(壇齋)로 초가삼간을 석교리 246번지에 창건하였으나, 재실이 좁고 퇴락하여 1917년 12월에 추원재를 다시 세울 것을 결의하고, 1918년 9월에 안종욱(安宗昱), 상봉(相鳳), 택호(宅鎬), 교덕(敎悳) 등의 주관으로, 석교리 229번지로 추원재를 이전 증축하였다.
▣ 1958년 10월 세사당회에서 안인식(安寅植) 등이 추원재 중건을 결의하고, 138인의 연명으로 전국 종친에게 통고하고, 1960년 4월에 강당 및 동재를 증축하였다.
▣ 1962년 10월 세사당회에서 향려단을 추원재 뒤편 석교리 181번지로 이설키로 결의하고, 1963년 7월에 향려단, 산파단을 추원재 비단으로 이설하였다.
그리고 1966년 가을에 오산단과 대산단을 이곳으로 이설합단하였다.
▣ 1986년 10월 새 단소에 새로운 추원재 및 전사청 건립을 위하여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1996년 11월에 건평 47평의 추원재를 짓고 관리사를 1999년에준공하였다.
▣ 2001년에 관항지 종회에서 「문성공 회헌 안선생 향려비각(文成公 晦軒 安先生鄕閭碑閣)」을 세우고 전재강(全在康) 기문(記文)으로 현액(懸額)하였다. 그리고 주방, 창고, 주차장, 화장실, 담장 등 부대시설 및 조경사업을 완료하였으며, 대종회장 안응모(安應模) 찬(撰)의 추원재중건기를 현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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